인적항변 : 인적항변 사유, 인적항변의 절단, 악의의 항변
1. 인적항변사유
인적항변은 어음법 제17조․수표법 제21조에 해당하는 인적항변(이하 ‘어음법 제17조에 해당하는 인적항변’이라 함)과 그렇지 않은 인적항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음․수표의 양도로 그 항변 사유를 새로운 소지인에게 주장할 수 없으므로 항변이 절단된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하다. 그러나 양자는 절단의 근거가 어음법 제17조인지 아닌지에서 차이가 나고, 또 어음․수표채무자가 악의의 항변을 하는데 있어 어음․수표소지인의 악의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1) 어음법 제17조에 해당하는 인적항변
어음법 제17조는 「환어음에 의하여 청구를 받은 자는 발행인 또는 종전의 소지인에 대한 인적 관계로 인한 항변으로써 소지인에게 대항하지 못한다. 그러나 소지인이 그 채무자를 해할 것을 알고 어음을 취득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속하는 항변은 주로 어음․수표의 실질관계에서 발생하는 항변이다. 원인관계가 부존재․무효라거나 취소․해제되었다는 항변, 원인관계가 공서양속 또는 강행규정에 위반하여 무효라는 항변, 대가가 교부되지 않았다는 항변 등이다. 또한 어음․수표와 상환하지 않고 이루어진 지급․면제․상계 등의 항변, 지급유예 특약 등 어음․수표 외에서 이루어진 특약의 항변도 이에 속한다.
(2) 어음법 제17조에 해당하지 않는 인적항변
아래에서 보는 항변들의 경우 어음․수표채무자는 어음․수표취득자에게 「악의 또는 중과실」만 있으면 어음․수표채무자를 「해할 의사」까지는 없어도 그 항변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의 항변들은 모두 어음법 제17조에 해당하지 않는 인적항변이다.
1) 교부흠결의 항변
어음․수표가 교부가 흠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통된 경우 발행인의 어음․수표상의 채무가 발생하는가에 관하여 판례는 권리외관설을 취하면서 “발행인은 원칙적으로 소지인에 대하여 어음상의 채무를 부담하나 그 소지인이 악의 또는 중과실에 의하여 그 어음을 취득하였음을 주장․입증하면 책임을 면할 수 있다(대판 1999.11.26. 99다34307).”는 입장이다.” 즉 교부흠결의 항변은 어음취득자에 대하여는 절단됨이 원칙이나 어음취득자가 교부흠결에 대하여 「악의 또는 중과실」이 있었으면 절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의사표시의 하자의 항변
민법상 의사표시의 하자에 관한 규정은 어음․수표행위에 그대로 적용되므로, 비진의의사표시․통정허위표시에 해당하는 어음․수표행위는 무효이고, 착오․사기․강박에 의한 어음․수표행위는 취소할 수 있다. 다만 그 무효․취소로써 선의의 제3자에게는 대항할 수 없다. 그런데 통설은 어음․수표의 유통성 보호를 위해 “선의의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다”의 의미를 약간 수정하여 “「악의 또는 중과실」이 있을 때에만 대항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판례는 “어음행위에 착오․사기․강박 등 의사표시의 하자가 있다는 항변은 어음행위 상대방에 대한 인적항변에 불과한 것이므로, 어음채무자는 소지인이 채무자를 해할 것을 알고 어음을 취득한 경우가 아닌 한, 소지인이 중대한 과실로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종전 소지인에 대한 인적항변으로써 소지인에게 대항할 수 없다(대판 1997.5.16. 96다49513).”라고 하여 이를 어음법 제17조에 해당하는 인적항변과 같이 보고 있다. 이 판례에 대해서는 이를 어음법 제17조에 해당하는 인적항변으로 구성하여 해의까지 요구할 근거는 없다는 비판이 있다.
3) 백지보충권 남용의 항변
백지어음․수표행위자는 보충권이 남용되었다는 항변을 선의의 어음․수표취득자에게는 할 수 없고, 「악의 또는 중과실」로 어음․수표를 취득한 자에게만 할 수 있다(어음법 제10조, 수표법 제13조). 여기서의 악의의 의미와 중과실의 판단 기준에 관해서는 백지어음․수표에서 후술한다.
4) 민법 제124조, 상법 제398조 위반의 항변
대리인이 본인의 허락 없이 자기계약 또는 쌍방대리로 어음․수표행위를 하거나(민법 제124조 위반) 주식회사의 이사가 이사회의 승인을 얻지 않고 어음․수표행위를 하였는데(제398조 위반), 그 어음․수표가 유통된 경우, 본인이나 회사는 어음․수표 소지인에게 그와 같은 항변으로 대항할 수 있는가? 통설은 선의의 소지인에게는 대항할 수 없으나, 「악의 또는 중과실」인 소지인에게는 대항할 수 있다고 한다(상대적 무효설).
2. 인적항변의 절단
(1) 의의
인적항변사유는 자신의 어음․수표행위의 상대방에 대해서만 원용할 수 있고 그 이후의 선의의 어음․수표소지인에게는 원용할 수 없다(어음법 제17조 본문). 이를 인적항변의 절단이라 한다. 자세한 내용은 기술하였다.
(2) 인적항변 절단의 요건
1) 배서 또는 교부에 의한 양도
어음․수표법이 예정하는 유통방법, 즉 배서 또는 교부에 의해 어음․수표가 이전되어야 한다. 상속․합병과 같은 포괄승계나 법원의 판결과 같이 어음․수표의 유통과 무관하게 어음․수표가 이전된 경우에는 항변이 절단되지 않는다. 또 어음․수표가 지명채권의 양도방법으로 양도된 경우나 기한후배서와 같이 어음․수표의 양도에 지명채권 양도의 효력밖에 없는 경우에도 항변이 절단되지 않는다.
2) 어음․수표취득자의 독립된 경제적 이익
어음․수표취득자에게 독립된 경제적 이익이 없는 양도의 경우에도 인적항변이 절단되지 않는다. 추심위임배서, 숨은 추심위임배서 등이 이에 속한다. 이와 같은 양도는 유통으로서의 의미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3. 악의의 항변
(1) 의의
인적항변이 절단되기 위해서는 제3자가 선의로 어음․수표를 취득해야 한다. 제3자가 어음․수표취득 시 인적항변 사유를 알았다는 등의 사정이 있으면 인적항변은 절단되지 않는다. 악의의 항변은 인적항변에만 존재한다. 이때 어음․수표채무자가 어음․수표소지인의 악의를 이유로 하는 항변을 「악의의 항변」이라 한다. 악의의 취득자는 보호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인적항변이 붙은 채로 권리가 양도되도록 한 것이다.
예를 들어 甲이 乙로부터 물건을 매수하고 대금지급을 위해 약속어음을 발행하였는데, 乙이 채무를 이행하지 않아 만기 전에 매매계약을 해제하였고, 이후 乙이 이 어음을 A에게 배서하여 A가 甲에게 어음금 지급을 청구한다고 하자. A가 어음 취득 시 매매계약 해제 사실을 몰랐다면 甲은 A의 청구에 대해 지급을 거절하지 못한다(인적항변의 절단). 그러나 A가 어음 취득 시 해제 사실을 알았고 나아가 그 취득으로 甲을 해할 것을 알았다면 甲은 계약 해제를 이유로 A에게 어음금의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 이때 甲이 A의 해의를 이유로 하는 항변이 악의의 항변이다.
(2) 「악의」의 내용
1) 어음법 제17조가 적용되는 인적항변의 경우
① 해의(害意)
어음법 제17조 단서는 “소지인이 「채무자를 해할 것을 알고」 어음을 취득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하여, 인적항변이 절단되지 않는 요건으로서의 소지인의 악의의 내용을 「해의」(害意)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의의 의미는 무엇인가? 판례는 “악의의 항변이라 함은 항변사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자기가 어음을 취득함으로써 항변이 절단되고 채무자가 해를 입는다는 사실까지도 알아야 한다(대판 1996.5.14. 96다3449).”라고 하여, 해의를 악의와 구별하고 있고, 통설도 같은 입장이다.
② 해의와 악의의 관계
통설은 어음․수표소지인이 항변의 존재를 알면서 어음․수표를 취득한 경우에는(악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어음․수표채무자를 해할 것을 알고(해의) 어음․수표를 취득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③ 중과실 있는 선의
어음․수표소지인이 항변의 존재를 몰랐으나 모르는데 중과실이 있었던 경우 어음․수표채무자는 악의의 항변을 할 수 있는가? 판례는 할 수 없다고 한다. 즉 “어음 채무자는 소지인이 그 채무자를 해할 것을 알고 어음을 취득한 경우가 아닌 한, 소지인이 중대한 과실로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종전 소지인에 대한 인적항변으로써 소지인에게 대항할 수 없다(대판 1996.3.22. 95다56033).”라고 하였다.
2) 어음법 제17조가 적용되지 않는 인적항변의 경우
이 경우 어음․수표채무자가 악의의 항변을 하기 위해서는 소지인에게 항변의 존재에 대하여 「악의 또는 중과실」이 있어야 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여기에서의 악의와 어음법 제17조 단서에서의 해의는 크게 구별되지 않으므로, 결국 소지인이 선의이나 중과실이 있는 경우에도 채무자가 악의의 항변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어음법 제17조가 적용되는 인적항변과 구별되는 점이다.
(3) 악의의 존재시기 및 입증책임
① 악의의 유무는 「어음․수표의 취득 시」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소지인에게 어음․수표 취득 시에 악의가 없었으면 어음․수표상 권리를 행사하는 시점에서 악의가 인정되더라도 어음․수표채무자는 악의의 항변을 할 수 없다. ② 어음․수표소지인의 악의에 대한 입증책임은 악의의 항변을 주장하는 어음․수표채무자에게 있다.
(4) 선의자로부터 취득한 악의자에 대한 악의의 항변
어음․수표소지인은 악의이나 그가 선의자로부터 어음․수표를 취득한 경우 어음․수표채무자는 소지인에게 악의의 항변을 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甲이 乙에게 약속어음을 발행하였고, 이 어음은 A, B에게 순차로 양도되었는데, 甲․乙 사이에 인적항변사유가 있었다고 하자. 어음 취득 시 A는 그 항변사유에 대해 선의였고 B는 악의였다고 할 때 B가 甲에게 어음금 지급을 청구할 때 甲은 B에 대하여 악의의 항변을 하여 지급을 거절할 수 있는가?
1) 통설 및 판례
통설은 선의자의 개입으로 항변은 영구히 차단되므로 그 이후의 취득자는 악의라 하여도 항변의 부담 없이 어음․수표를 취득한다고 하여 악의의 항변을 인정하지 않는다. 판례도 같은 입장이다. 즉 “현재의 어음소지인에게 어음을 양도한 자가 어음취득 당시 선의였기 때문에 그에게 대항할 수 없었던 사유에 대하여는 현재의 어음소지인이 비록 어음취득 당시 그 사유를 알고 있었다고 하여 그것으로써 현재의 어음소지인에게 대항할 수는 없다(대판 1994.5.10. 93다58721).”라고 판시하였다. 이에 의하면 위 예에서 甲은 A가 선의여서 A에게 인적항변으로 대항할 수 없었으므로 B가 악의이더라도 B에게 인적항변으로 대항할 수 없다.
2) 통설 및 판례에 대한 비판
소수설은 어음․수표채무자는 소지인이 악의이기만 하면 그 이전 단계 배서인이 선의였다 하여도 소지인에게 악의의 항변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인적항변의 절단은 유통성 보호를 위해 예외적으로만 인정되는 것이므로 유통성 보호와 무관한 악의의 취득자에게까지 그 혜택이 미치게 할 수 없고, 통설과 같이 해석하면 채무자가 최종소지인에게 악의의 항변을 하려면 그의 악의뿐만 아니라 중간의 모든 배서인의 악의를 전부 입증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