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왕(歌王) 조용필과 음악저작권
1980년대 ‘오빠부대’를 형성하며 한국 대중가요사에 한 획을 그은 가수 조용필. 그 동안 수많은 히트곡을 내면서 동시에 다양한 음악실험을 했던 한국 대중음악계의 살아있는 전설. 그러기에 가수의 왕(歌王)이라고 불리는 가수.
최근 환갑이 넘은 가왕 조용필의 새로운 앨범 발매, 쇼케이스, 콘서트 개최와 더불어 25년 전의 저작권 사연이 시나위 리더 신대철이 올린 페이스북 글 때문에 널리 알려져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그 사연을 당시 신문기사 및 판결문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다.
가왕 조용필은 1976년 호소력 있는 허스키 보이스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가사가 접목된 ‘돌아와요 부산항에’란 곡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때가 가왕은 26세의 나이였지만 이미 가수 경력은 10년이나 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미8군 무대에서 보컬그룹으로 활동하다 발표한 이 노래는 노래 제목 때문인지 부산에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다가 서울로 상륙하게 됐다.
하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란 곡은 발표 때부터 저작권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작곡가 황선우씨가 ‘지구레코드’, ‘킹프로덕션’, ‘오아시스레코드’, ‘힛트’라는 4개의 음반사에 저작권을 양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자, 나훈아, 송대관, 조경수, 김연자 등 15명의 가수들이 이 노래를 다투어 부르고 음반을 내는 기이한 현상도 발생했다.
조용필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킹프로덕션’에서 출반했으나, 이듬해인 1977년 신대철의 아버지 신중현이 있는 ‘지구레코드’로 이적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지구레코드사 임모 사장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지구레코드사는 그 당시의 대표적인 레코드사로서, 조용필이 전속돼 있던 80년대 초에는 이미자가 전속돼 있던 태양음향과 함께 가장 많은 가수를 데리고 있었던 대형레코드사였다. 지금의 SM, YG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하지만 대중에게 알려지기 전인 72년도의 대마초 사건이 뒤늦게 문제가 돼 조용필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숙의 시간을 가지게 됐다. 그러나 79년 말 대마초 연예인의 방송활동 규제 등이 풀리면서, 조용필은 80년 초 드라마 주제곡 ‘창밖의 여자’로 다시 화려한 재기를 하게 된다.
이후 조용필은 창밖의 여자가 수록된 1집을 포함해 2집 촛불(80년), 3집 고추잠자리(81년), 4집 못찾겠다 꾀꼬리(82년), 5집 친구여(83년), 6집 눈물의 파티(84년), 7집 여행을 떠나요(85년), 8집 허공(85년)까지의 앨범을 지구레코드에서 출반했다.
지구레코드에서 이렇게 많은 앨범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가왕 조용필이 1977년 10월 21일부터 1986년 11월 30일까지 9년간 지구레코드의 전속 계약 가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속계약이란 그 당시의 주류적 계약 형태로서, 음반이나 테이프가 팔리는 수와 상관없이 일정 기간(통상 2~3년) 동안 전속계약금만 받는 계약의 형태이다. 이 계약형태는 전적으로 레코드사에 유리했지만, 당시 가수는 많고 레코드사가 과점형태로서 수도 적었기 때문에 음반을 내야 하는 가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1983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가수 1400여명중 100여명만 레코드사에 전속돼 있었다고 함).
1981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디스크와 테이프가 100만장이나 팔렸어도 조용필이 받은 것은 돈으로 1000만 원과 승용차 한대라는 사실은 우리 가요계의 비리의 한 단면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표현돼 있으니, 전속계약의 폐해가 이만저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때문에 톱가수 조용필도 생계를 위해 밤무대를 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속계약금(또는 전속금)은 85년경에는 1억 원을 넘어가고 그 즈음 이선희는 2억 원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87년경부터는 주류적 계약 형태가 ‘인세제’로 넘어가게 된다.
1988년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전속계약제를 선택한 인기가수의 경우 2~3년 전속기간에 3000만 원에서 5000만 원 정도의 전속금을 받고, 반대로 인세제를 택하면 음반 1장당 650원의 인세를 받는다고 한다. 인세제를 택한 경우 10만장 판매에 5000만원 정도의 수익이 생기는 것이다.
작곡가ㆍ작사가의 사정은 가수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1982년 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한 곡당 1만5000원에서 2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하니, 그 사정을 알만하다. 조용필의 히트곡인 ‘창밖의 여자’의 작사가 배명숙씨가 받은 돈은 20만원에 불과했다. 조용필이 1981년 받은 돈이 1000만원이었으니 1/50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
한편 다른 가수들처럼 가왕 조용필측도 전속계약이 종료되는 1986년 11월 30일경, 지구레코드사의 임모 사장에게 인세제로의 전환을 제안했고, 1986년 12월 31일 인세제를 주내용으로 하는 계약이 체결되게 된다.
당시 상황에 대해 1987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지구레코드와 전속계약을 했던 조용필은 3년 단위의 계약을 갱신해 오다가 얼마 전 인세제와 병행하는 조건으로 1억2000만 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지구레코드사는 당시의 상황을 “가수 조용필씨와는 1977년 10월 21일부터 1986년 11월 30일까지 전속 가수제로 지속돼 오던 중 본 계약 기간 만료 전 인세제로 전환하기로 하면서 이에 덧붙여 저작권(상기 기간 중의 자작곡 : 31곡)만을 양도 받기로 하고 폐사는 이에 상응한 금액을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했으나 이후, 가수 당사자가 자신의 저작권 일체를 넘겨줘 버리고 나면 장래의 수입이 적을 것 같으니 저작권의 일부만 양수해 달라고 간청하기에 공연권과 방송권은 가수에게 주고 제작회사로서의 특성상 복제권과 배포권만 폐사가 양수하기로 양보한 것입니다(1986. 12. 31. 법률사무소에서 공증)”라고 말하고 있다(출처 : http://nbbs2.sbs.co.kr/).
정리하면, 조용필이 작곡한 31곡에 대해 복제ㆍ배포권은 지구레코드사가 가져가고, 공연ㆍ방송권은 조용필이 가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용필이 자신의 노래를 복제해 발매하거나 배포할 수 있는 권리가 없고, 방송이나 공연에서 노래를 부를 수는 있지만 그 노래로 음반이나 DVD를 발매하면 지구레코드사로 수익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1986년 12월 31일 체결된 계약은 여러 가지 내용이 포함돼 있지만, 조용필측과 지구레코드 사이의 다툼의 핵심이자 10년 후인 1997년 있었던 소송상의 쟁점이 됐던 것은 ‘조용필이 직접 작곡한 31곡의 복제·배포권의 양도’이다.
때마침 같은 날인 1986년 12월 31일, 1957년에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시대 저작권법을 베껴 제정된 이후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던 기존의 저작권법이 베른조약의 영향으로 새로이 개정됐고, 다음해인 1987년 7월 1일 시행을 앞두고 있었다.
1957년도 법에서는 저작물에 대한 복제권·배포권의 개념이 정립이 되지 않고, 단지 저작물을 ‘복제’해 발매 또는 ‘배포’하는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발행권’이라는 내용에 포함돼 있었다. 이처럼 당시 법에 내포는 돼 있지만 명시가 되지 않았던 저작물에 대한 복제권·배포권이, 조용필과 지구레코드 사이의 계약서에 명기가 된 것이다.
한편 1987년 법에서는 복제권·배포권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정의하고 있다. 즉 복제에 대해는 ‘인쇄·사진·복사·녹음·녹화 그 밖의 방법에 의해 유형물로 다시 제작하는 것’이라고, 또한 배포에 대해는 ‘저작물의 원작품 또는 그 복제물을 일반 공중에게 대가를 받거나 받지 아니하고 양도 또는 대여하는 것’이라고 독자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법을 비교해 보면, 작사자·작곡가의 권리는 비교적 달라지지 않았으나, 음반제작자의 권리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즉 1957년 법에서는 2차적 저작자로서 음반의 복제·배포권이 인정된 반면, 1987년 법에서는 저작인접권자의 권리로서 음반의 복제·배포권이 인정됐다.
‘복제·배포권’이라는 것은 이 사안에서 두 가지로 쓰일 수 있다. 노래(음악저작물)의 복제·배포권과 음반의 복제·배포권이 그것이다. 전자인 노래의 복제·배포권은 노래의 저작권자, 즉 작사가·작곡가가 가지는 것이고, 후자인 음반의 복제·배포권은 음반의 권리자, 즉 음반제작자(저작인접권자)가 가지는 것이다. 다만 음반의 복제·배포권은 반드시 노래의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조용필과 지구레코드 사이의 분쟁에서 1986년 12월 31일 계약이 체결되기 이전에는, 조용필이 작곡한 31곡의 저작권은 각 노래의 작사자와 함께 작곡가인 조용필에게 귀속되는 것이기에, 31곡의 복제·배포권은 작곡가 조용필이 각 노래의 작사자와 함께 가지고 있었다. 반면 음반의 복제·배포권은 조용필의 허락 하에 지구레코드사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86년 12월 31일 계약이 체결된 이후에는, 계약이 유효하다면, 지구레코드사는 31곡 자체의 복제·배포권을 양도받았으므로, 노래 자체의 복제·배포권을 가지게 된다.
위 1986년 12월 31일 계약에 대해, 최근 조용필의 소속사 YPC프로덕션은 이 계약에 대해 소송이 시작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계약 당시 ‘복제·배포권’을 넘기는 행위를 녹음된 음반의 ‘판권’을 넘기는 것으로 이해했지, 노래의 저작권리마저 주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조용필 소속사 YPC프로덕션이 말하는 ‘판권(版權)’이라는 단어는 법적 용어는 아니지만 널리 쓰이는 용어로서 일의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때론 저작권이라는 뜻으로도 쓰이기도 하고, 때론 출판권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여러 가지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조용필측은 “계약 체결 당시 ‘노래’의 복제·배포권을 준다고 이해하지 않고, ‘음반’의 복제·배포권을 넘기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바, 조용필측의 ‘판권’의 의미는 ‘음반의 복제·배포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조용필측의 주장대로 하면, 노래의 복제·배포권은 조용필이 가지는 것이고, 음반의 복제·배포권을 지구레코드가 가지게 된다. 반대로 지구레코드사의 주장대로 하면, 음반뿐만 아니라 노래의 복제·배포권도 모두 지구레코드사가 가지는 것이다.
참고로, 노래에 대한 권리자는 3부분 즉 작사자·작곡자 / 연주자·가수 등의 실연자 / 음반제작자로 나누어져 각 협회가 조직돼 있으며, 현재 기준으로 보면 600원의 다운로드 음원 한 곡에 대해, 그 중의 40%(240원)를 유통업체가 가져가고, 나머지 60%(360원)를 작사자·작곡자, 연주자·가수 등의 실연자, 음반제작자가 나누어 갖는데, 다시 60% 중 44%(264원)를 음반제작자가 가져가고, 작사자·작곡가가 10%(60원), 연주자·가수 등의 실연자가 6%(36원)를 가져가게 된다.
조용필의 주장대로 하면, 현재 기준에서 600원 중 조용필측은 96원, 지구레코드사는 264원을 가져가고, 지구레코드사의 주장대로 하면, 600원 중 조용필측은 36원, 지구레코드사는 324원을 가져가는 것이다.
계약 체결 이후 지구레코드사는 조용필로부터 양수받은 31곡의 복제·배포권을 근거로 조용필의 허락을 받을 필요 없이 베스트앨범, 옴니버스앨범, 힛트곡모음앨범 등의 여러 앨범을 출반하면서, 조용필의 열성팬들의 많은 반발을 사곤 했다.
조용필측과 지구레코드 사이에 양도계약이 체결된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1997년 1월경, 지구레코드 임사장은 조용필을 상대로 31곡의 저작권(복제·배포권)을 양도받았음의 확인을 구하는 내용의 저작권양도사실확인 등의 청구소송을 서울지방법원 제12민사부에 제기하기에 이른다. (피고에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도 포함돼 있으나 이 부분은 제외한다)
언론에서는 조용필이 먼저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지구레코드 임사장측이 먼저 소송을 제기했다. 지구레코드 임사장측은 조용필이 자신에게 양도한 31곡에 대한 저작권료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용필을 상대로 이러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 사건의 쟁점은 조용필과 임사장 사이에 체결된 양도계약이 조용필 또는 그 대리인 매니저 유모씨의 궁박, 경솔, 무경험으로 인한 것으로서 불공정한 법률행위(민법 제104조)에 해당해 무효인가 여부였고, 이러한 주장은 조용필측이 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조용필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송은 계약서 내용이 그대로 받아들여져 지구레코드 임사장에게 31곡에 대한 복제·배포권이 있다는 내용으로 조용필의 패소로 끝났다(서울지방법원 제12민사부 1998. 10. 16. 선고 97가합178 판결).
특히 제1심 판결문에 따르면, 조용필의 매니저 유모씨가 양도계약을 체결했고, 이후 1987년 8월경 조용필의 인감증명을 첨부해 지구레코드 임사장과 공동으로 문화관광부장관(당시는 문화공보부장관)에게 31개의 노래에 관한 저작재산권 중 복제,배포권의 양도 등록을 신청하고 같은 달 20. 그 양도등록절차를 경료해 주었다고 돼 있는바,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건대, 평상시 다른 사안에서도 법원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 민법 제104조의 불공정한 법률행위 항변을, 이 사안에서만 특별히 받아들여 주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제1심 판결에 대해 조용필측은 항소했으나, 항소심 역시 패소하게 된다(서울고등법원 1999. 11. 30. 선고 98나61038 판결). 항소심에서 조용필측은 민법 제104조의 불공정한 법률행위로서 무효 주장 외에 민법 제103조의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 위반으로서 무효 주장, 민법 제109조의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로서 취소 주장까지 했으나 법원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소송은 또 다시 조용필측의 상고로 대법원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대법원 역시 조용필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내용대로 확정했다(대법원 2000. 4. 21. 선고 99다72989 판결, 저작권양도사실확인등).
대법원은 “항소법원은 이 사건 양도행위는 불공정한 법률행위 또는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돼 무효이거나 착오에 의한 의사표시에 해당돼 이를 취소한다는 피고 조용필의 항변들을 판시와 같은 이유로 모두 배척했는바, 이를 기록과 대조해 살펴보면, 항소법원의 위와 같은 사실인정과 판단은 옳다”고 판시했다.
더불어 “항소심의 판단에는 이 사건 계약의 목적물이 악곡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녹음된 녹음물(또는 녹음필름)로서 원고에게 그 녹음물에 대한 배타적 사용권이 이전됐을 뿐이라는 피고 조용필의 주장을 배척한 취지가 포함돼 있음이 분명하므로, 거기에 상고이유의 주장과 같은 저작권계약의 해석에 관한 법리오해나 심리미진 또는 판단유탈의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정리하면, 이 사건 양도계약은 음반에 대한 복제·배포권 양도계약이 아니라 노래에 대한 복제·배포권 양도계약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으며, 이 사건 양도계약에 무효사유나 취소사유가 존재하지 않아 유효하다는 것이다.
조용필측은 대법원까지 가서 패소했고 이 판결은 확정돼 더 이상 다툴 수 없는 상태가 됐는바, 판결의 효력 중 기판력 때문에 조용필측이 설사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판결 내용이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법적인 해결 방안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다.
다만 쌍방 합의로서 조용필이 자신의 곡을 찾아오는 방법은 남아 있다. 지구레코드 임모 사장은 2006년에 사망했는데, 임모 사장의 상속인이 현재 조용필의 31곡에 대해 조용필에게 자발적으로 돌려주는 방법이 그것이다.
물론 무조건 무료로 돌려주는 것이 옳다는 식의 의미는 아니다. 계약 당시와 그 이후의 구체적인 금전관계는 당사자들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부분이기에, 당사자들이 직접 마음을 열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함으로써 우리 시대 최고의 가왕과 한 시대 최고의 음반제작사가 진심으로 화해해 대중음악 산업의 발전에 함께 기여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