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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속의 지식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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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핵심 요약>

역사적으로 기술혁신은 국가의 부강함을 결정짓는 핵심이었으며, 근대 이후에는 이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지식재산권 제도'가 혁신의 지속성을 담보하고 패권 국가를 결정짓는 결정적 도구가 되었습니다.

1. 근대 이전: 중국의 기술 패권과 황제 중심의 혁신

  • 동양의 우위: 15세기 이전까지 인류 문명의 혁신은 중국이 주도했습니다(4대 발명, 방직, 주철 기술 등).
  • 혁신 동력: 근대적 특허법 대신 황제의 지도력과 국가 주도의 장려책(한림원, 인재 등용, 하사품 등)이 혁신을 이끌었습니다.
  • 시장의 역할: 당·송 시대의 활발한 상거래와 시장 발달은 노동 분업과 기술 혁신을 촉진한 실질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2. 근대 서양의 역전: 특허 제도의 탄생과 산업혁명

  • 제도의 힘: 중국이 해금(海禁) 정책으로 정체될 때, 유럽은 이탈리아의 길드와 판매 특권에서 시작된 특허 제도를 통해 기술을 자산으로 보호하기 시작했습니다.
  • 영국의 성공: 증기기관 기술을 개량하고 특허로 보호받은 제임스 와트의 사례처럼, 영국은 강력한 특허 보호와 명예혁명 이후의 재산권 보장을 통해 프랑스를 제치고 산업혁명을 완수했습니다.

3. 미국의 민주적 특허 제도와 제2차 산업혁명

  • 제도의 민주화: 영국·프랑스의 특허 제도가 고비용과 관료주의로 귀족 전유물이었던 반면, 미국은 저렴한 비용과 편리한 절차로 일반 서민(에디슨 등)도 발명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 국가적 지원: 링컨 정부의 철도 건설과 대학 지원 등 제도적 기반 위에, 민주적 특허 시스템이 결합하여 미국을 세계 최강의 경제국으로 만들었습니다.

4. 지식재산권의 확산과 대한민국의 대응

  • 글로벌 표준화: 일본의 추격을 경험한 미국은 1980년대 '영 리포트' 등을 통해 지재권 보호를 강화하며 이를 국제 통상 규범(WTO/TRIPs)으로 만들었습니다.
  • 한국의 변화: 우리나라는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요구와 국제 트렌드에 발맞춰 법제를 정비해왔으며, 현재는 대륙법과 영미법이 조화된 전문적인 지식재산 보호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 본 법률위키는 저자의 허락을 받아 『지식재산권법』(제6판)의 원문을 수록하였습니다. 본 저서의 전체 목차와 체계적인 분류는 [지식재산권법] 목차 및 전체 가이드: 정상조·박준석 공저 (제6판) 페이지에서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역사책은 그리스와 로마의 찬란한 문화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서양의 눈부신 기술혁신과 부국강병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이 언제나 서양의 기술혁신을 학습하고 추격해야 했던 것은 아니다. 15세기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우리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 온 기술혁신이 대부분 중국에서 이루어졌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서양으로 전파되곤 하였다. 예컨대, 인류의 4대발명이라고 하는 화약(火藥), 나침반, 종이, 인쇄술(印刷術) 대부분 중국 특히 당조(唐朝; 618–907)와 송조(宋朝; 960–1279) 시대에 이루어진 후 서양으로 전파되었다.1) 중국의 대마 방직(紡織) 기술도 영국의 수력 방직 기술보다 500년이나 앞섰고, 중국은 영국보다 700년이나 앞서서 대량 주철(鑄鐵) 능력을 확보해서 이미 11세기에 막대한 선철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기술혁신과 찬란한 문화가 특허나 저작권이라고 하는 근대적인 법제도에 의해서 이룩된 것은 아니다.

1) 데이비드 S. 랜즈 저, 안진환․최소영 옮김, 『국가의 부와 빈곤』(한국경제신문사, 2009), 106면쪽.

중국에서의 기술혁신은 당 태종(太宗)과 같은 황제의 관심과 지도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2) 당송시대에 황제의 관심과 명령이 오늘날의 특허나 저작권에 관한 법제도와 다르지만 기술혁신과 창작을 장려하고 확산시킨다고 하는 목적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었다. 오늘날의 법 제도는 개인과 기업들의 자유와 창의를 촉진함으로써 기술혁신을 추구하는데 반해서, 중국의 황제는 나라 전체의 기술혁신과 부국강병에 관심을 갖고 기술 관련 연구와 교육 및 인재등용에 관한 다양한 장려책을 시행하였다. 예컨대, 당송시대의 왕립연구기관 ‘한림원(翰林院)’과 최초의 실험실이라고 할 수 있는 ‘금단각(金丹阁)’ 그리고 왕립교육기관 ‘국자감(国子监)’3) 등은 과학기술에 관한 연구와 교육도 담당했다. 당송시대의 황실은 과학기술 분야 인재의 등용에 있어서도 인도, 아랍 등의 국적을 불문하고 전문가를 등용하고, 기술혁신의 인센티브로 상금이나 전답, 면직물이나 견직물 등을 하사하였다.4)

2) 李健, 「唐宋时期科技发展与唐宋变革」, 『中州学刊』 总第180期 (2010年 11月), 第177-179页.

3) Alain George, “Direct Sea Trade Between Early Islamic Iraq and Tang China: from the Exchange of Goods to the Transmission of Ideas,”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Volume 25, Issue 4 (October 2015), p. 599.

4) 刘尚希․韩凤芹․史卫, 「唐宋科技繁荣: 政府行为与创新环境」, 第28-29页.

애덤 스미스가 정확히 간파한 바와 같이, 시장의 발달은 노동분화 및 기술혁신을 가져다준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산업혁명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양의 경제발전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천년 이상 이미 중국에서 시장의 발달로 기술혁신과 부국강병이 실현된 역사적 사실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당송시대에는 자유로운 상거래가 허용되었고 실크로드를 통한 외국과의 교역도 활발하였기 때문에, 상공인의 투자와 기술혁신이 왕성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예컨대, 시장의 발달로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에는 아랍의 상인과 학자 및 기술자들이 다양한 상품과 정보를 교환했고,5) 11세기 송나라 쓰촨성의 상인들은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6) 또한 15세기 명나라 초 해외원정을 떠난 정화(鄭和)는 미주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보다 수십년 전에 더 커다란 선박으로 더 커다란 규모의 선단으로 더 먼 거리를 왕복하면서 일종의 조공무역을 했다. 중국의 조선, 항해, 총포 등 관련 기술의 수준과 상거래활동이 그 당시 서양에 비해 얼마나 앞섰는지 잘 보여주었다.7) 중세 유럽은 영리를 추구하는 상업활동을 천시하는 기독교 질서 속에 자급자족하는 장원경제에 머물고 있었던 점과 비교해보면, 상거래활동이 왕성하게 이뤄지고 부의 축적을 위한 투자와 혁신이 권장되는 당조 및 송조시대의 중국이 과학기술과 국부에 있어서 유럽을 능가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5) Alain George, Op. cit., p. 598.
6) 존 P. 파월슨 저, 권기대 옮김, 『부와 빈곤의 역사』(나남, 2007), 318쪽.
7) 주경철, 『대항해 시대: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135쪽.

  중국 명나라는 영락제가 사망한 이후 황실의 권력 강화책으로 해상무역을 금지하는 해금(海禁)정책을 채택하고, 돛대가 두 개 이상 달린 선박의 건조를 처벌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해상무역도 처벌하였다.8) 정화 원정 이후 중국은 해상무역을 규제하면서 서서히 기술혁신이 정체되고 생산력이 저하되는 길을 걷게 된다. 이와는 정반대로, 정화 원정이 막을 내린 지 60년 후,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착하고,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을 비롯한 서양 각국은 경쟁적으로 헤외시장을 개척하고 법제도를 근대화하면서 기술혁신과 산업발전의 혁명을 시작했다. 

8) 제레드 다이아몬드 저, 김진준 옮김, 『총, 균, 쇠』(문학사상사, 1998), 602쪽.

 서양에서의 기술혁신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의해서 갑자기 촉진되고 가속화된 것은 아니다. 컬럼버스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서양의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제도적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서양에서 새로운 기술을 재산으로 보호하려고 하는 노력은 중세 후반의 길드(guild)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회와 시대에 따라서 길드의 구체적인 모습이 달랐고, 중세 옥스퍼드 대학 형성의 배경이 된 학생조합 내지 학생길드로부터 상공인의 이익을 강화하기 위해서 운영되어온 상공인조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길드가 있었다. 방직공, 유리세공, 열쇠공, 출판업자, 상인 또는 무역업자 등의 상공인이 조직한 길드는 그 회원들 사이에 기술을 공유하고 품질관리와 비밀유지를 중시하면서 독점적 이익을 누렸다. 이태리의 도시국가들은 길드에 판매 특권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들에게도 판매 특권 (letters patent)을 부여해서 새로운 기술을 장려하고 보호했는데, 이는 베니스의 1474년 특허법과 영국의 1623년 독점법과 같은 근대적인 특허제도를 탄생시킨 씨앗이 되었다. 

 베니스의 특허법과 이태리 도시국가들의 판매특권제도는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고 베니스를 비롯한 도시국가들이 유럽에서 제일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다.9) 다만, 15세기 중반에 오토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이태리의 동방무역은 차단되고 천주교의 경직성과 신분질서의 고착화로 이태리 상공인들의 기술혁신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서 영국에서는 명예혁명 이후 상공인들의 자유와 재산의 보호가 강화되면서,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증기기관10)을 비롯한 기술의 혁신과 특허출원 및 특허소송이 급증하였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상공인들의 자유와 특허법에 의한 기술의 보호에 의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예컨대, 증기기관의 원천기술은 프랑스인 드니 파팽(Denis Papin)이 발명했지만 그 당시 프랑스에는 발명을 보호하기 위한 근대적인 특허법이 존재하지 않았고,11) 파팽은 그 당시 루이14세의 신교도 위그노 탄압을 피해서 독일로 건너가서 증기기관을 사용한 세계 최초 증기선을 만들어 운항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했지만 독일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진 뱃사공 길드의 폭력적인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다.12) 프랑스 파팽의 실패는 영국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성공과 크게 대조된다. 제임스 와트는 파팽의 증기기관을 비롯한 선행기술을 개량한 후 특허제도 덕분에 자신의 증기기관을 직접 판매하거나 증기기관 사업자들로부터 로얄티를 받고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 과학기술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뒤져 있던 영국이 프랑스나 독일보다 기술혁신과 산업혁명에 앞서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특허제도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9) Joel Mokyr, “Intellectual Property Rights, the Industrial Revolution, and the Beginnings of Modern Economic Growth,” 99 American Economic Review 349 (2009). 
10) 근대적인 방식의 증기기관은 18세기 초에 개발되었지만, 그 성능을 대폭 향상시킨 증기기관은 제임스 와트가 개발해, 1769년 처음으로 특허를 받고 영국 전역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1) 프랑스 최초 근대적인 특허법은 프랑스 혁명 이후 1791년이 되어서야 제정된다: Gabriel Galvez-Behar. Was the French Patent System democratic?. 2008. <halshs-00544730>, https://halshs.archives-ouvertes.fr/halshs-00544730
12) 대런 애쓰모글루․제임스 로빈슨 저, 최완규 옮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시공사, 2012), 295쪽.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서 출원등록된 특허 건수의 15%가 직물 산업 분야였다. 이는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기술혁신을 선도한 산업이 직물 산업이라는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13) 발명가들에게 자신의 발명에 대한 권리가 부여되고 발명에 대한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면, 사회 전체의 기술혁신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다. 물론 기술혁신 및 산업발전과 특허 활동 증가가 동일한 기간에 일어났다고 해서 서로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업혁명 당시 기술혁신이 왕권의 합리적 통제 및 상공인의 자유 등에 의해 촉진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특허 제도가 자유경쟁과 자유무역을 위축시키고 오히려 기술혁신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반론이 강하게 제기되기도 하였다.14)

13) 그다음으로 많이 특허출원 등록된 기술은 해상 및 육상운송, 금속, 화학 분야인데, 이들 기술도 산업혁명을 이끌어 온 주요 산업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특허 제도와 기술혁신의 밀접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Richard J. Sullivan, “The Revolution of Ideas: Widespread Patenting and Invention During the English Industrial Revolution,” 50 Journal of Economic History 349 (Jun., 1990), p. 351.
14) Mark D. Janis, “Patent Abolitionism,” 17 Berkeley Technology Law Journal 899 (2002).

 산업혁명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증기기관에 관한 기술혁신의 경우, 제임스 와트가 기존의 증기기관을 개량해서 특허권을 취득한 뒤15) 그 특허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다수의 소송까지 제기했고, 이러한 특허권 행사로 후발 기업가들에 의한 증기기관의 개선이 대폭 지연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산업혁명 당시 특허 제도에 반대하거나 무시하는 발명가와 기업가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의회와 자본을 가진 상공인들은 특허 제도와 같이 기술혁신을 촉진하기 위한 법제도가 영국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하는 믿음에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예컨대,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허권 존속기간의 연장을 청원했는데, 영국 의회는 그 존속기간을 25년간 연장해 주는 예외적 조치를 취한 바 있다.16) 특허로 인한 독점의 폐해가 지적되고 있었지만, 영국 의회는 기술혁신을 위한 인센티브로서 특허권보호에 의한 독점적 이익의 부여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한 것이다. 16세기 말 윌리엄 리(William Lee)가 편물기계를 발명해 판매특권을 신청했지만 그 당시 영국 여왕은 기계보급으로 수제모직물을 만들어 판매해온 사람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판매특권 부여를 거절했다.17) 200년 전 영국여왕과 달리 18세기 영국 의회는 특허제도를 중시하고 특허권의 연장이라는 예외적인 조치에 합의한 것이다. 영국 의회의 조치는 증기기관의 발명과 활용으로 마법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제임스 와트와 같은 발명가를 영웅시하고, 적절한 인센티브로서의 특허제도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가진다.18) 영국의 특허제도와 정치문화가 영국의 산업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 간 것이다. 

15) 제임스 와트는 뉴커먼 증기기관을 개량한 발명에 대해 1769년부터 1785년에 걸쳐 6건의 특허권을 취득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James_Watt (2015. 7. 8. 방문)
16) 대런 애쓰모글루․제임스 로빈슨 저, 최완규 옮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시공사, 2012), 158쪽.
17) 대런 애쓰모글루․제임스 로빈슨, 앞의 책, 268쪽.
18) 특허제도의 문화적 이해와 배경에 관하여, Jessica Silbey, The Mythical Beginnings of Intellectual Property, 15 Geo. Mason L. Rev. 319 (2008) 참고.

 물론 기술혁신과 산업혁명이 특허제도에 의해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영국이 과학기술의 선진국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대륙보다 먼저 산업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이 이미 17세기에 권리청원과 명예혁명으로 전제군주의 절대왕권을 제한하고 자유와 재산을 보호함으로써 상공인들의 투자와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외국으로 확산되면서 근대적인 기본권제도와 특허법 제도도 유럽과 미국으로 전파되었다. 예컨대,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전제군주를 중심으로 한 구체제가 무너진 후 1791년에 특허법을 제정했고, 미국은 자유와 재산의 보호를 비롯한 기본 인권을 규정한 독립선언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전쟁을 마치고 난 1793년에 특허법을 제정하였다. 19세기 초반에는 스위스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 국가가 특허법을 채택하였다.19)

19) Fritz Machlup and Edith Penrose, “The patent controversy in the nineteenth century,” 10 The Journal of Economic History (1950), pp. 1-29.

 절대왕권을 제한하고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 근대적인 법제도가 영국에서 시작되어 유럽대륙으로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그의 활자인쇄술 발명으로 지식과 정보가 빠른 속도로 전파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속하고 저렴하게 지식과 정보를 인쇄하고 배포할 수 있는 활자인쇄술 덕분에 이태리 도시국가에서 시작된 르네상스가 유럽대륙으로 확산되고 이어서 과학혁명이 영국에 전달되고 산업혁명의 씨앗이 될 수 있었다. 1440년 독일을 구텐베르그가 금속세공인으로 작지만 강한 활자를 만들어서 와인이나 올리브유 생산에 쓰이던 압착기(screw press)를 활용해서 신속하게 다량 인쇄할 수 있는 활자인쇄술을 개발해서 활용하기 시작한 이후 불과 50년 사이에 출판서적이 10만 권에서 2천만 권으로 급증하였다.20) 귀족에 독점되어 있던 지식과 정보가 인쇄술 덕분에 다수의 전문가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확산되고 재생산될 수 있었다. 중국과 조선은 그보다 수십년 전부터 금속활자술을 개발했지만 왕실의 독점으로 지식과 정보의 확산을 통제하려고 했을 뿐이다. 유럽의 왕실과 교회는 민간업자들에 의한 출판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고 오직 길드를 통한 금서 단속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1517년 마틴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95개 항의 질문과 요구 조건을 담은 대자보를 작성했는데, 금속활자술 덕분에 불과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에 전달되었고 종교 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 

20) 정병석, 앞의 책, 175쪽

 활자인쇄술이 개발되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15세기 당시 영국은 유럽대륙에 비해서 낙후되어 있었고 인쇄술이 영국에 수입되어 활용되기 시작하는데 3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21) 영국이 유럽대륙에 비해서 인쇄술의 도입은 늦었지만 ‘복제(copy)’에 관한 권리를 보호하는데 있어서는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의 앤여왕은 1710년에 학문의 장려를 위해서 인류 최초의 근대적인 저작권법을 제정했다. 금속활자술은 근대적인 저작권제도를 만나서 영국의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확산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예컨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은 1776년에 저술되었는데, 10여 년 만에 5판이 발간되면서 영국 사회 전체에 보급되었다. 

21) 사업가 겸 문학가 캑스턴(William Caxton)이 유럽에서 귀국하면서 1476년 인쇄기를 도입해서 “캔터베리 이야기(The Tale of Canterbury)”를 인쇄해서 판매하고 본인이 이솝우화를 번역해서 출판하기도 했다.

 영국은 상공인의 자유 및 특허제도와 함께 18세기에 산업혁명에 성공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지만, 신흥 상공인들이 귀족화되고 적기조례와 같은 불합리한 규제를 만들어내면서 기술혁신이 정체되고 19세기말에는 20년의 장기적인 경기침체에 빠진다. 다른 한편,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보다 더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 그리고 철저히 재산을 보호해주는 이상적인 법제도를 만들고 19세기에 제2차산업혁명을 선도한다. 물론 흑인에 대한 철저한 차별이 있었지만, 백인 유럽이민자들에 한해서는 유럽에서의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빈부에 관계없이, 범죄 경력 여부에 관계없이 모두 새로운 땅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모두 평등하게 누리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영국의 특허제도는 귀족이나 신흥 상공인들만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용이 소요되고 예측가능성이 낮은 제도인데 반하여, 미국의 특허제도는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모든 계층의 발명가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보다 민주화된 제도라고 평가된다. “어느 불쌍한 발명가의 특허이야기”라고 하는 소설에서 Charles Dickens는 특허출원이 특허청뿐만 아니라 법무부 등 35곳의 관청을 방문해야 하는 험난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96파운드 38펜스(그 당시 교사 연봉이 70파운드임을 감안할 때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37,000 달러)에 달하는 공식 수수료 이외에 막대한 인건비와 뇌물비용까지 소요되기 때문에, 일반 서민으로서는 도전하기 어려운 제도임을 한탄한 바 있다.22)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19세기 초 근로자의 평균 일급이 1.5프랑이었지만 특허 10년 등록세가 1000프랑이나 되었기 때문에, 소수 귀족과 부자들만 특허제도를 이용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23)

22) Jeremy Phìllips, Charles Dickens and the ‘Poor Man’s Tale of a Patent' (EC Publishing Limited, Oxford, 1984), pp.20-24.
23) Gabriel Galvez-Behar. The Patent System during the French Industrial Revolution: Institutional Change and Economic Effects. Jahrbuch für Wirtschaftsgeschichte / Economic History Yearbook, De Gruyter, 2019, Patent Law and Innovation in Europe during the Industrial Revolution, 60 (1), pp.31-56.

 이에 비해서, 미국의 그 당시 특허출원에 소요되는 공식 수수료는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해서 618달러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는 특허출원하기 위해서 지방에서 말을 타고 런던에 가야 했지만, 미국에서는 어느 주에서나 우편으로 저렴하고 신속하게 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특허출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주로 부자나 엘리뜨로 한정되었지만, 19세기 초 미국에서는 저렴한 출원비용으로 인해서 특허권자 가운데 부자 또는 전문직업인은 19%에 불과하고 40%의 특허권자는 에디슨처럼 초등학교 이하의 교육만 받은 보통사람들이었다.24) 미국의 특허제도에는 영국에서와 같은 관료주의 및 고비용의 폐해가 없었기 때문에, 에디슨과 같은 일반 서민들 가운데 혁신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발명을 하고 특허권을 취득하며 제너럴 일렉트릭과 같은 기업을 만들어 제2차 산업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에디슨의 발명과 함께 제2차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1870년 기준으로, 인구 3100만 명의 영국에서는 2천여 건의 특허가 등록되는데 반해서 그 당시 영국보다 조금 더 많은 인구 3800만 명의 미국에서는 무려 5배가 넘는 1만2천여 건의 특허가 등록되고 왕성하게 산업혁명의 엔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25) 에디슨도 특허도서관을 자주 찾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미국은 전국 주요 도시에 특허도서관을 두고 누구든지 쉽게 특허기술을 찾아볼 수 있게 함으로써 기술확산의 적극적인 노력을 했다. 

24) 지붕 널빤지 장사에서 술집에 이르기까지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아버지의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나서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은 바 없이 집에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Daron Acemoglu and James A. Robinson, Why Nations Fail: The Origins of Power, Prosperity, and Poverty (Crown Business, New York, 2012), p33.
25) 19세기 인구는 위키피디아 참고(https://en.wikipedia.org/wiki/Demographic_history_of_the_United_States,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Industrial_Revolution). 

 링컨대통령은 1862년 태평양철도법(Pacific Railroad Act)을 제정하여 동부와 서부 간의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추진하고 같은 해 토지교부금법(Land-Grant Act)을 제정하여 주립대학의 공과대학에 방대한 토지를 교부해서 농업기술과 군사기술의 연구개발을 적극 장려하고 지원했다. 그로부터 7년 후에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었고 바로 그때부터 제2차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미국이 제2차산업혁명을 시작할 때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3권분립의 근대적인 헌법질서를 채택하고 이와쿠라사절단(岩倉使節團)이 미국과 유럽 제도 학습한 후 특허(專賣特許)제도를 비롯한 근대적인 법제도를 도입한다. 일본은 세계대전에서 패했지만 곧이어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의 엄청난 군수물자 수요를 맞이하여 제조업을 다시 부흥시키고, 1980년대에 도요타 자동차와 소니 워크맨을 비롯한 일본 제품이 미국시장을 거의 다 점령하고 일본의 부동산 기업인이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인수하는 정도에 이르면서 미국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1985년 플라자합의로 엔화 절상을 통하여 일본의 대미수출을 어렵게 만들고 동시에, 휴렛패카드 죤영(John Young)회장을 위원장으로 구성한 “산업경쟁력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라 새로운 첨단기술의 개발을 위해 지재권 보호를 강화하고 무역장벽을 없애기 위한 정책을 펼친다.26) 미국은 우리나라와의 무역협상에서 지재권보호의 강화를 강력히 요구했고, 1986년 우리 정부는 특허법, 상표법, 저작권법, 의장법, 부정경쟁방지법 등의 지재법을 개정하고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을 제정했다. 우리 정부는 1994년에 세계무역기구협정을 비준하면서 그 부속협정으로 ‘통상문제로서의 지재권’협정에 따라 우리 지재법을 개정하고 1998년에는 산업재산권 분쟁 해결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하여 특허법원을 설립했다. 국내외 수요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 지재법은 상대적으로 빈번히 개정되었고 전반적으로 대륙법계의 뼈대 위에 지속적으로 영미법계의 법리를 반영한 법개정이 이루어졌다.

26) Global Competition—The New Reality (The President’s Commission on Industrial Competitiveness, 1985).

 

*출처: 정상조, 박준석,『지식재산권법』 (제6판, 홍문사, 2024년) 제1장 총론 Ⅰ. 지식재산권이란? 2. 역사 속의 지식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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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성일시: 6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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