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관계의 유형
1. 기본적 인과관계
행위와 구성요건적 결과 사이에 다른 원인의 개입 없이 직접적으로 인과적 연관성이 인정되는 경우이다. 가령 甲이 乙을 총으로 쏘아 사살한 경우 甲의 행위와 乙의 사망 사이의 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2. 이중적 인과관계(택일적 인과관계)
甲과 乙이 각각 丙에게 권총을 쏴서 丙이 사망한 경우처럼 단독으로도 동일한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여러 개의 원인이 결합하여 일정한 결과가 발생한 경우이다. 이 때 甲과 乙의 행위는 丙의 사망에 대하여 각각 인과관계가 인정된다.
甲과 乙은 서로 의사연락 없이 각각 丙을 살해하기로 결의하고 서로 모르게 丙이 마실 음료수에 각각 치사량의 독약을 넣었는데, 丙은 그 음료수를 마시고 사망한 경우, 이중적 인과관계는 결과에 대한 원인관계가 규명된 경우이다. 따라서 사례에서는 형법 제19조의 독립행위의 경합이나 제263조의 상해죄에 있어서 동시범의 특례조항이 적용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동시범에는 인과관계가 판명된 동시범과 인과관계가 판명되지 않은 동시범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 형법 제19조는 인과관계가 판명되지 않은 경우를 독립행위의 경합이라고 하여 특별취급 하도록 한 규정일 뿐, 인과관계가 판명된 2인 이상의 정범으로서 동시범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례에서는 甲과 乙에게는 각각 살인죄의 인과관계와 객관적 귀속이 모두 인정되고, 따라서 제19조나 제263조가 적용될 여지는 없다.
3. 누적적(중첩적) 인과관계
甲과 乙이 각각 치사량 미달의 독약을 투여하였으나 독약의 양이 합쳐져 치사량이 되어 丙이 사망한 경우처럼 각각 독립해서는 결과를 야기할 수 없는 조건들이 공동으로 작용하여 일정한 결과를 야기시킨 경우이다. 조건설과 합법칙적 조건설에 의하면 여기에서 甲과 乙의 행위가 丙의 사망과 모두 인과관계를 갖는 것은 틀림없다. 다만 결과의 객관적 귀속이 결여되어 미수만 문제될 수 있다.
4. 가설적 인과관계
(1) 의의
발생한 결과에 대한 원인행위가 없었더라도 가설적 원인(현실로 작용하지 않은 가설적 대체원인 또는 유보적 원인)에 의해서 동일한 결과가 발생하였을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경우에 가설적 원인과 결과발생간의 연관관계를 말한다.
예컨대 甲이 丙을 비행기 탑승직전에 사살하였는데, 그 비행기는 이륙 후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례에서 비행기 추락사고와 丙의 사망 사이의 연관관계를 말한다. 이 때 가설적 인과관계에서는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고 현실로 작용한 甲의 사살행위와 丙의 사망 사이에만 인과관계가 인정된다.
가설적 인과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설적 인과관계에 대칭되는 개념으로서 현실로서 작용한 추월적 인과관계와 경합적 인과관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여기서 추월적 인과관계나 경합적 인과관계는 현실로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로서 가설적 인과관계의 일유형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2) 추월적(추월한) 인과관계
나중의 조건이 처음의 조건을 추월하여 결과를 야기 시킨 경우에 나중의 조건과 발생된 결과 사이의 현실적 인과관계를 추월적 인과관계라고 한다. 예컨대 甲이 丙에게 약효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약이 든 맥주를 마시게 하였으나 약효가 일어나기 전에 乙이 약효가 즉시로 나타나는 독약이 든 쥬스를 丙에게 먹여서 丙이 즉사한 사례에서 乙의 행위와 丙의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추월적(추월한) 인과관계라고 한다.
(3) 경합적(경합한) 인과관계
어느 행위에 의하더라도 결과가 동시에 발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의 현실적 인과과정을 말한다. 예컨대 乙이 채무면탈의 목적으로 채권자 丙을 밖으로 불러내어 사살하였으나 그렇지 않더라도 丙은 테러범 甲이 미리 설치해 놓은 시한폭탄에 의해 결국 같은 시각에 사망할 수밖에 없었던 사례에서 乙의 사살행위는 현실적 인과관계로서 경합적(경합한) 인과관계가 된다.
(4) 결론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2)에서는 乙의 행위와 丙의 사망 사이에, (3)에서는 乙의 丙에 대한 사살행위에 대해서만 인과관계가 인정된다.
➲ [설명 1] 추월적(추월한) 인과관계와 경합적(경합한) 인과관계의 사례 중에서 약효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약이나 테러범의 시한폭탄은 현실적으로 작용하지 않은 인과관계로서 가설적 인과관계가 된다(가설적 대체원인). 조건설, 합법칙적 조건설에 의할 때 가설적 인과과정은 인과관계가 부정되고, 미수성립만이 문제된다(통설). 가설적 조건은 현실적 조건의 인과진행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 [설명 2] 이재상 교수는 통설과는 반대로 위의 두 가지 사례에서 현실적으로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인 (2)에서 乙의 행위와 丙의 사망, (3)에서 乙의 丙에 대한 사살행위에 대한 인과관계를 가설적 인과관계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인 (2)에서 약효가 천천히 나타나는 독약이 당연히 추월적 인과관계가 된다.
5. 인과관계의 단절 - 단절적 인과관계
자유롭고 독립된 다른 제2의 행위 또는 자연현상이 개입하여 본래 진행 중인 제1의 원인행위의 효력이 나타나기 전에 이를 단절시키고 스스로 구성요건적 결과를 야기하는 경우 인과관계의 단절이 문제된다.
甲이 丙에게 치명적인 독약을 투여하였으나, 그 효력이 나타나기 전에 乙이 丙을 사살한 경우, ① 甲의 행위측면에서 보면 乙의 행위에 의해 丙의 사망과의 인과관계가 단절 당한 것이고(소위 단절당한 인과관계 → 인과관계 부정), ② 乙의 행위측면에서 보면 甲의 행위를 추월하여 丙의 사망결과를 야기한 추월한 인과관계(소위 추월적 인과관계)가 문제된다고 한다. 사례에서 甲의 행위와 丙의 사망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아니하므로 甲은 살인미수죄가 되고, 乙은 살인기수죄가 된다.
이처럼 단절당한 인과관계는 현실적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 가설적 대체원인, 즉 가설적 인과관계에 불과하다.
6. 비유형적 인과관계
일정한 행위가 결과발생에 대한 원인이 되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 다른 원인(ex. 자연현상 내지 천재지변)이 기여하였거나 피해자의 잘못 또는 피해자의 특이체질 내지 상태 또는 제3자의 고의 또는 과실(ex. 의사의 중대한 의료과오)이 결합하여 결과가 발생한 경우를 비유형적 인과관계라고 한다. 여기서 최초의 원인행위는 결과발생시까지 그 효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甲은 원수인 丙을 죽이려고 총을 쏘아서 丙에게 총상을 입혔다.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丙은 거의 완쾌되어서 다음 날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 그 날 밤 丙은 병원옥상에서 산책을 하면서 밤공기를 마시다가 발을 헛딛어서 그만 실족사하고 말았다.
여기서 丙의 사망에 甲이 일정한 원인을 제공하였지만, 丙의 잘못도 결합하여 발생하였는바, 이러한 인과관계의 유형이 바로 비유형적 인과관계이다.
비유형적 인과관계에 대하여 조건설이나 합법칙적 조건설을 취하면 인과관계의 존재는 인정된다. 다만 규범적인 평가의 관점인 객관적 귀속이론으로 발생결과를 행위자의 행위의 결과로 귀속시킬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서 기수 또는 미수의 죄책이 결정된다. 위 사례에서 甲의 행위는 丙의 사망에 대하여 인과관계는 인정되지만 丙은 결국 자신의 실수로 사망한 것이므로 규범평가적 관점에서 丙의 사망의 결과를 甲에게 객관적으로 귀속시킬 수 없다고 할 것이다. 甲은 살인미수죄의 죄책만을 진다.
그리고 비유형적 인과관계에 있어서 위와 같은 결론은 예견가능성을 판단척도로 하는 상당인과관계설에 의하여도 예견가능성의 유무에 따라 동일하게 나타난다. 다만 상당인과관계설에 의하면 결과귀속이 부정될 경우 아예 (상당)인과관계가 부정된다.
참고로 이재상 교수가 설명하고 있는 ‘인과관계의 중단’ 사례도 비유형적 인과관계의 사례에 포함되어 설명될 수 있다.
7. 단절적 인과관계와 비유형적 인과관계의 구별
비유형적 인과관계와 구별되는 것이 바로 가설적 인과관계의 일유형인 단절적 인과관계의 경우이다. 위의 甲이 丙에게 치명적인 독약을 투여하였으나, 그 효력이 나타나기 전에 乙이 丙을 사살한 사례와 같이 자유롭고 독립된 다른 후행행위(乙의 사살행위)가 개입하여 본래 진행 중인 선행하는 원인행위(甲의 독살행위)의 효력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를 단절시키고 스스로 구성요건적 결과를 야기하는 경우에 단절적 인과관계가 문제된다. 단절적 인과관계에 있어서는 선행행위의 인과관계는 그 효력이 나타나기도 전에 단절을 당하게 되므로 선행행위와 결과 사이에는 인과관계조차 인정되지 아니하여 미수만이 인정될 뿐이다. 즉 甲의 독살행위는 丙의 사망에 대하여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유형적 인과과정은 선행행위의 인과과정이 그 효력을 나타낸 후 어느 정도 진행되는 도중에 후행행위가 개입된 것으로 인과관계는 일단은 인정된 상태에서 객관적 귀속여부만이 문제된다. 위의 비유형적 인과관계의 사례에서 甲의 행위는 일단 丙의 사망에 대하여 인과관계가 인정된다. 여기서 甲이 丙에게 총상을 입힌 원인행위는 丙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사망할 때까지 그 효력이 진행되었는 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최초의 원인행위의 효력이 나타나기도 전에 단절되어 버리는 단절적 인과관계와 구별된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