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어음수표 (백지 어음수표의 요건, 보충 전 백지 어음수표의 지위, 백지보충권의 행사)
1. 의의
(1) 개념
백지어음․수표란 어음․수표행위자가 기명날인 또는 서명을 제외한 어음․수표요건의 전부 또는 일부를 후일 타인으로 하여금 보충시킬 의사로 일부러 공백으로 남겨둔 미완성의 어음․수표를 말한다. 백지어음․수표는 원인관계가 부분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어음․수표를 발행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발행된다.
(2) 구별개념
1) 불완전어음
백지어음․수표는 어음․수표요건을 흠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효인 불완전어음․수표와 같으나, 후일 보충시킬 의사로 일부러 그렇게 하였다는 점과 유효라는 점에서 불완전어음․수표와 다르다.
2) 준백지어음․수표
백지어음․수표는 어음․수표요건을 백지로 한 것인 반면, 준백지어음․수표는 유익적 기재사항을 백지로 하고 이에 관한 보충권이 주어진 어음․수표를 말한다. 준백지어음․수표에 대해서는 백지어음․수표에 관한 법리가 준용된다.
(3) 백지어음․수표에 관한 분쟁의 유형
백지어음․수표와 관련한 분쟁은 대부분 「보충권을 수여한 사실이 있는지 여부」와 「백지보충권의 범위」에 관하여 발생한다. 예컨대, 소지인이 발행인에게 백지어음임을 주장하며 어음금의 지급을 구하는데, 발행인은 보충권을 수여한 사실이 없으니 그 어음은 어음요건을 결한 무효인 불완전어음이므로 어음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다투거나(보충권 수여사실 존부에 관한 다툼), 소지인이 어음금액을 200만 원으로 기재하여 발행인에게 어음금의 지급을 구하는데, 발행인은 자신이 수취인에게 부여한 보충권의 범위는 150만 원까지이므로 이를 벗어난 50만 원에 대해서는 지급할 수 없다고 다투는 경우와 같다(보충권의 범위에 관한 다툼).
2. 법적 성질
백지어음․수표를 어음․수표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통설은 어음․수표요건이 흠결되었으므로 어음․수표로는 볼 수 없고, 백지보충권의 행사로 어음․수표가 될 수 있다는 기대권과 그 백지보충권을 표창하는 특수한 유가증권이라고 한다.
3. 백지어음․수표의 요건
(1) 어음․수표요건의 일부 또는 전부의 흠결
① 백지어음․수표가 되기 위해서는 기명날인 또는 서명을 제외한 어음․수표요건의 일부 또는 전부가 기재되지 않아야 한다.
② 지급지․발행지․만기와 같이 흠결 시 보충규정이 있는 사항은 불기재 시 보충규정에 의해 자동적으로 일정 내용으로 보충되므로, 이를 백지로 한 백지어음․수표는 있을 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추후 소지인으로 하여금 보충하게 할 의사로 일부러 기재하지 않은 것이라면 백지어음․수표가 된다. 보충규정은 발행인이 실수로 누락한 경우에 대비한 것일 뿐이다. 판례도 “지급기일을 공란으로 하여 약속어음을 발행한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그 어음은 일람출급의 어음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백지어음으로 보아야 한다(대판 2003.5.30. 2003다16214).”라고 판시하였다.
(2) 백지보충권의 수여
백지어음․수표란 발행인에 의하여 백지를 보충할 권한이 수여된 어음․수표다. 백지보충권은 발행인의 의사에 의해 수취인에게 수여된다. 백지어음․수표는 이 보충권이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 불완전어음․수표와 차이가 난다. 그런데 보충권 수여사실은 백지어음․수표의 문면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에 관한 다툼이 있을 때 해당 어음․수표가 백지어음․수표인지, 불완전어음․수표인지를 어떻게 구별할지 그 판단기준이 문제가 된다.
1) 판례
판례는 “발행인에게 보충권을 줄 의사로 발행한 것이 아니라는 점, 즉 백지어음이 아니고 불완전어음으로서 무효라는 점에 관한 입증책임이 있다(대판 2001.4.24. 2001다6718).”라고 한다. 이와 같은 판례의 입장을 통상 “어음․수표요건이 흠결되면 백지어음․수표로 추정된다”는 의미로 이해하여 백지어음․수표추정설이라 부른다.
2) 통설
학설은 주관설, 객관설, 절충설 등도 있으나, 통설은 권리외관설을 취한다. 권리외관설은 보충권의 존재 여부는 원칙적으로 발행인에게 보충권을 수여할 의사가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결정한다. 그러나 백지어음․수표의 외관을 만들어 유통시킨 것에 귀책사유가 있는 발행인은 그러한 외관을 믿은 선의의 취득자에 대하여 불완전어음․수표임을 항변할 수 없다고 한다.
3) 판례와 통설의 차이점
판례와 통설은 발행인이 보충권을 줄 의사로 발행한 것이 아님을 입증한 경우 발행인의 책임에서 차이가 난다. 이 경우 발행인은 판례에 의하면 면책되나, 통설에 의하면 선의의 소지인에 대하여는 면책되지 않는다.
(3) 기명날인 또는 서명의 존재
백지어음․수표에는 기명날인 또는 서명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기명날인 또는 서명은 반드시 발행인의 것이어야 하는가?
학설의 대립이 있다. ① 통설은 반드시 발행인의 것일 필요는 없고, 인수인․배서인․보증인 등 어음․수표행위자 가운데 누구의 것이라도 있으면 된다고 한다. 발행을 위한 기명날인 또는 서명 없이 다른 어음․수표행위가 먼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이유로 한다. ② 반면 소수설은 반드시 발행인의 기명날인 또는 서명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백지어음․수표란 발행인이 소지인에게 백지보충권을 수여한 어음․수표인데, 발행인의 기명날인 또는 서명이 있기 전에는 보충권의 수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견해는 다른 어음․수표행위가 발행에 선행할 수는 있어도, 발행인의 기명날인 또는 서명이 있기까지는 백지어음․수표가 아니라고 한다.
4. 보충 전 백지어음․수표의 지위
(1) 권리행사의 제약
1) 원칙
백지어음․수표는 백지를 보충하기 전에는 어음․수표가 아니므로 이를 가지고는 어음․수표에 대하여 인정되는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다.
① 백지가 보충되지 아니한 백지어음으로 지급제시를 하면 이는 적법한 지급제시가 되지 못하므로 소지인은 상환청구권을 보전하지 못한다. 따라서 상환의무자가 이러한 소지인의 청구에 응하여 어음금을 지급하더라도 이는 채무 없이 변제한 것이 되어 그 상환의무자는 자신의 전자에 대하여 재상환청구를 할 수 없다(대판 1993.11.23. 93다27765). ② 또한 백지어음을 가지고 어음금 청구소송을 제기하여도 백지를 보충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승소할 수 없다. 다만 어음금 청구소송에서 백지가 보충되었는지를 판단하는 시점은 변론종결시이므로, 백지인 상태로 소를 제기하였더라도 변론종결시까지만 보충하면 승소가 가능하다. ③ 약속어음의 소지인이 어음요건의 일부를 흠결한 이른바 백지어음에 기하여 어음금 청구소송(이하 ‘전소’라고 한다)을 제기하였다가 위 어음요건의 흠결을 이유로 청구기각의 판결을 받고 위 판결이 확정된 후 위 백지 부분을 보충하여 완성한 어음에 기하여 다시 전소의 피고에 대하여 어음금 청구소송(이하 ‘후소’라고 한다)을 제기한 사안에서 판례는 “원고가 전소에서 어음요건의 일부를 오해하거나 그 흠결을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전소와 후소는 동일한 권리 또는 법률관계의 존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어서 그 소송물은 동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확정판결의 기판력은 동일한 당사자 사이의 소송에 있어서 변론종결 전에 당사자가 주장하였거나 주장할 수 있었던 모든 공격 및 방어방법에 미치는 것이므로, 약속어음의 소지인이 전소의 사실심 변론종결일까지 백지보충권을 행사하여 어음금의 지급을 청구할 수 있었음에도 위 변론종결일까지 백지 부분을 보충하지 않아 이를 이유로 패소판결을 받고 그 판결이 확정된 후에 백지보충권을 행사하여 어음이 완성된 것을 이유로 전소 피고를 상대로 다시 동일한 어음금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위 백지보충권 행사의 주장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전소판결의 기판력에 의하여 차단되어 허용되지 않는다(대판 2008.11.27. 2008다59230).”라고 판시하였다.
2) 시효의 중단
위에서 백지를 보충하지 않고는 권리행사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백지를 보충하지 않은 채로 하는 지급제시나 소송의 제기에는 소멸시효 중단의 효력도 없는가?
위 이론에 충실하자면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으나, 통설은 시효중단의 효력을 인정한다. 시효중단을 위해서는 권리 위에 잠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한데, 백지를 보충하지 않고 하는 지급제시도 그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판례도 같은 입장이다. 즉 백지를 보충하지 않은 채로 소를 제기하였는데, 소송 진행 도중 소멸시효가 완성하였고, 이후 변론종결 전에 백지를 보충한 사안에서, “만기는 기재되어 있으나 지급지, 지급을 받을 자 등과 같은 어음요건이 백지인 약속어음의 소지인이 그 백지 부분을 보충하지 않은 상태에서 어음금을 청구하는 것은 어음상의 청구권에 관하여 잠자는 자가 아님을 객관적으로 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청구로써 어음상의 청구권에 관한 소멸시효는 중단된다고 할 것이다. 이 경우 백지에 대한 보충권은 그 행사에 의하여 어음상의 청구권을 완성시키는 것에 불과하여 그 보충권이 어음상의 청구권과 별개로 독립하여 시효에 의하여 소멸한다고 볼 것은 아니므로 어음상의 청구권이 시효중단에 의하여 소멸하지 않고 존속하고 있는 한 이를 행사할 수 있다(대판 2010.5.20. 2009다48312 전원합의체).”라고 판시하였다. 요컨대, 백지어음의 백지를 보충하지 않고 어음금청구를 하더라도 시효중단의 효력이 생긴다(통설⋅판례).
(2) 백지어음․수표의 양도
백지어음․수표도 양도성이 인정된다. 백지어음․수표를 양도하면 백지보충권과 백지보충을 조건으로 한 어음․수표상의 권리가 양수인에게 이전한다. 문제는 양도방법이다. 통설판례는 백지어음․수표는 어음․수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음․수표의 양도방법, 즉 배서․교부에 의해 양도할 수 있다고 한다. 그와 같은 관습법이 있음을 근거로 한다. 따라서 백지어음․수표의 배서에는 권리이전적 효력, 담보적 효력이 인정되고, 백지어음․수표는 선의취득의 대상이 되며, 백지어음․수표가 배서․교부에 의해 양도된 경우 인적항변이 절단된다. 백지어음․수표의 점유를 상실한 경우에는 제권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 제권판결을 받은 자는 발행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권리행사를 해야 하는가? 판례는 백지어음에 대하여 제권판결을 받은 자는 「어음 외의 의사표시로서」 백지보충권을 행사하고 어음금의 지급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한다(대판 1998.9.4. 97다57573).
5. 백지보충권의 행사
(1) 백지보충권의 의의
보충권이란 백지어음․수표의 흠결된 어음․수표요건을 기재하여 백지어음․수표를 완전한 어음․수표로 변환시킬 수 있는 권능을 말한다. 보충권은 소지인의 일방적인 의사표시만으로 행사하므로 형성권이다(통설). 보충권은 발행인과 수취인 간의 어음․수표 외적인 합의에 의해 수취인에게 주어지고{어음외계약설(통설)}, 일단 발생한 보충권은 백지어음․수표에 체화되어 어음․수표법적 양도방법에 의해 전전유통된다. 보충권은 현재의 소지인인 흠결된 어음․수표요건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행사한다.
(2) 보충권의 행사기간
1) 백지어음의 보충권 행사기간
① 원칙—만기 이외의 어음요건이 백지인 어음
A. 청구의 상대방이 주채무자인 경우 보충권은 어음상 권리의 소멸시효가 완성하기 전에는 행사해야 한다. 어음의 주채무자에 대한 어음금 지급청구권의 소멸시효기간은 만기로부터 3년이므로(어음법 제70조 제1항), 백지어음을 가지고 주채무자에게 어음금 지급청구권을 행사하려면 만기로부터 3년 내에 보충권을 행사하여야 한다.
B. 청구의 상대방이 상환의무자인 경우 이 경우 보충권의 행사기간은 소멸시효기간과는 무관하다. 상환의무자에게 상환청구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미리 상환청구권 보전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지급제시기간 내에 지급인 또는 약속어음의 발행인에게 지급제시를 하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지급제시는 완전한 어음을 제시하는 것을 말하므로, 지급제시 전에 백지가 보충되어야 한다. 따라서 백지보충권은 지급제시기간, 즉 지급을 할 날 또는 이에 이은 2거래일이 경과하기 전에 행사하여야 한다.
② 만기가 백지인 어음
A. 청구의 상대방이 주채무자인 경우 만기가 백지인 어음은 소멸시효의 기산점이 없으므로 어음상의 권리가 시효로 소멸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주채무자에게 어음금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어음상 권리가 시효로 소멸하기 전까지 백지보충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은 이 경우에 적용할 수 없다. 이 경우에는 별도의 독자적인 기준으로 보충권 행사기간을 정해야 한다.
ⓐ 학설 ⅰ) 보충권은 형성권이므로 20년이라는 견해, ⅱ) 일반채권과 동일하게 10년이라는 견해, ⅲ) 상사시효를 적용하여 5년이라는 견해, ⅳ) 원인채권이 민사채권이면 10년, 상사채권이면 5년이라는 견해, ⅴ) 주채무자에 대한 어음상의 권리와 같이 3년이라는 견해, ⅵ) 일람출급어음의 제시기간과 유사하게 보아 1년이라는 견해, ⅶ) 일람출급어음의 제시기간 1년에 만기 이외의 사항이 백지인 어음의 보충권 행사기간 3년을 더하여 4년이라는 견해 등이 있다.
ⓑ 판례 판례는 “만기를 백지로 하여 발행된 약속어음의 백지보충권의 소멸시효기간은 백지보충권을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3년으로 보아야 한다(대판 2003.5.30. 2003다16214).”라고 하였다. 백지약속어음의 보충권 행사에 의하여 생기는 채권은 어음금 채권이며 약속어음의 발행인에 대한 어음금 채권의 소멸시효기간은 만기로부터 3년이라는 점을 근거로 한다.
B. 청구의 상대방이 상환의무자인 경우 이 경우에는 보충권 행사기간에 관하여 특별한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만기가 보충되어야 지급제시기간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소지인은 만기를 보충하여 지급제시기간이 정해지면 일반원칙에 따라 그 기간 내에 지급제시를 하여 상환청구권을 보전하면 된다.
2) 백지수표의 보충권 행사기간
① 원칙—발행일 이외의 수표요건이 백지인 수표
백지수표 소지인은 수표의 지급제시기간 내에 백지를 보충한 완전한 수표로 지급제시를 하여야 상환청구권을 보전할 수 있다. 따라서 백지수표의 보충권은 수표의 지급제시기간, 즉 발행일로부터 10일이 경과하기 전에 행사하여야 한다(수표법 제29조 제1항).
② 발행일이 백지인 수표
수표의 경우 지급제시기간이 발행일을 기준으로 정해지므로, 발행일이 백지이면 기산점이 없어 지급제시기간이 정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백지보충권은 지급제시기간이 경과하기 전에 행사해야 한다」는 원칙은 이 경우에는 적용할 수 없다. 이 경우 보충권 행사기간의 문제는 상환청구권 보전과 관련한 것이긴 하나, 논리적으로는 만기가 백지인 어음의 주채무자에 대한 청구를 위한 보충권 행사기간과 같은 문제이다. 그래서 판례는 만기가 백지인 어음에서와 같은 논리로 “발행일을 백지로 하여 발행된 수표의 백지보충권의 소멸시효기간은 백지보충권을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6개월로 봄이 상당하다(대판 2001.10.23. 99다64018).”고 판시하였다. 백지수표의 보충권 행사에 의하여 생기는 채권은 수표금 채권이고, 수표의 발행인에 대한 상환청구권은 제시기간 경과 후 6개월간 행사하지 아니하면 소멸시효가 완성되는 점 등을 근거로 한다.
(3) 보충의 효과
소지인이 보충권의 범위 내에서 백지를 보충하면 백지어음․수표는 완전한 어음․수표가 되고, 소지인은 이를 가지고 어음․수표상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1) 백지보충의 효력발생시기
보충의 효력은 장래에 향하여 발생하고 과거로 소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백지어음․수표를 가지고 지급제시를 한 후 소송을 제기하고 변론종결 전에 백지를 보충한 경우 이행지체에 따른 이자는 지급제시를 한 때부터가 아니라 백지를 보충한 때부터 발생한다(대판 1970.3.10. 69다2184). 또한 백지어음․수표에 한 인수․배서․보증 등의 어음․수표행위는 보충 전에는 효력이 정지되어 있다가 백지를 보충하면 비로소 그 행위의 내용에 따른 효력이 발생한다.
2) 어음․수표행위의 성립시기
백지어음․수표에 한 어음․수표행위의 효력은 보충 시부터 발생한다 하여도, 그 행위의 성립시기는 행위가 실제로 행하여진 때이지 백지를 보충한 때가 아니다. 따라서 백지어음에 한 배서가 기한후배서인지 여부, 백지어음․수표에 어음․수표행위를 한 행위자의 권리능력․행위능력․대리권의 유무 등은 모두 백지어음․수표상에 어음․수표행위를 실제로 한 시점을 기준으로 결정한다.
이 중 백지어음에 배서를 하고 거절증서 작성 기간 경과 후에 보충을 한 경우 그 배서가 기한후배서인지 여부가 특히 문제된다. 예를 들어 甲이 2015. 3. 1. 乙에게 만기를 2015. 5. 31.로 하고 금액을 백지로 한 약속어음을 발행하였는데, 乙이 2015. 4. 1.이 어음을 A에게 배서하고 A는 2015. 6. 10. 금액을 보충하였을 경우 乙의 배서가 기한후배서인지의 문제이다. 이에 대해 과거 판례는 “백지어음에 한 모든 어음행위는 백지가 보충되었을 때에 효력이 발생하고 보충의 효과가 보충 전으로 소급할 수는 없다. 따라서 백지어음의 만기 전에 한 배서라도 만기 후에 백지가 보충된 때에는 만기 후의 배서로서의 효력밖에 생길 수 없다(대판1965.8.31. 65다1217).”라고 하여 기한후배서라 하였다. 그러나 이후 판례를 변경하여 “어음행위는 보충에 의해 효력이 발생하나, 어음행위의 성립시기는 어음행위 자체의 성립시기로 결정하여야 하므로 백지어음에 만기 전에 한 배서는 만기 후에 백지가 보충된 때에도 기한후배서가 되지 않는다(대판 1971.8.31. 68다1176 전원합의체).”라고 하였다. 통설도 현재의 판례와 같은 입장이다.
(4) 보충권의 남용(부당보충)
1) 의의
수여된 보충권의 범위를 초과하여 보충이 이루어진 경우를 보충권의 남용 또는 부당보충이라 한다. 어음․수표금액에 관한 부당보충이 가장 흔히 이루어진다. 발행인은 자신이 수여한 보충권의 범위에서만 책임을 짐이 원칙이나, 부당보충된 어음․수표가 유통되는 경우 문면상으로는 부당보충사실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부당보충 사실을 모르는 취득자에게까지 이 원칙을 관철하면 어음․수표의 유통성이 침해된다. 그래서 어음법․수표법은 미완성으로 발행한 어음․수표에 미리 합의한 사항과 다른 내용을 보충한 경우, 소지인에게 악의 또는 중과실이 없는 한 그 합의의 위반을 이유로 소지인에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어음법 제10조, 수표법 제12조). 이때 소지인의 악의 또는 중과실은 채무자가 입증해야 한다. 물론 소지인이 악의 또는 중과실로 부당 보충된 어음․수표를 취득한 경우에도 발행인은 자신이 유효하게 보충권을 수여한 범위 안에서는 당연히 어음․수표상의 책임을 진다(대판 1999.2.9. 98다37736).
예를 들어 甲이 乙에게 어음금액을 백지로 한 어음을 발행하면서 보충권의 범위를 100만 원으로 제한하였는데 乙이 어음금액을 150만 원으로 부당보충하였다고 하자. 乙이 직접 甲에게 어음금의 지급을 청구하면 甲은 부당보충된 50만 원의 범위에서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乙이 이 어음을 A에게 양도하고 A가 甲에게 어음금의 지급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甲은 부당보충을 이유로 A에게 대항하지 못하므로 결국 A에게 150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 다만 A가 부당보충 사실을 알았거나 중과실로 알지 못하고 어음을 취득한 경우에는 甲은 A에게 50만 원의 지급을 거절할 수 있다. A의 악의 또는 중과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甲에게 있다. 이때도 甲은 A에게 보충권 범위 내인 100만 원은 지급하여야 한다.
2) 어음법 제10조, 수표법 제12조의 적용 범위
선의의 제3자가 보충권이 남용된 어음․수표를 소지하게 되는 데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① 백지 부분이 이미 부당보충되어 있는 어음․수표를 취득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위 사례에서 A가 이미 수취인 乙에 의해 어음금액이 150만 원으로 부당보충 되어 있는 약속어음을 취득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어음법 제10조, 수표법 제12조가 적용된다는 데에는 의문이 없다.
② 제3자가 보충권의 범위를 잘못 알고 아직 백지인 상태의 어음․수표를 취득하여 보충권을 넘어 백지를 보충하는 경우이다. 예컨대, 위 사례에서 A가 수취인 乙로부터 “150만 원을 한도로 어음금액을 보충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어음금액이 백지인 상태의 약속어음을 양수하여, 스스로 어음금액을 150만 원으로 기재하는 것이다. 이때에도 어음법 제10조와 수표법 제12조가 적용되는가에 대해서는 견해의 대립이 있으나, 통설은 백지어음․수표의 유통성 보호를 위하여 적용을 긍정한다. 판례도 적용을 긍정하는 전제에 있다(대판 1978.3.14. 77다2020).
3) 「악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어음․수표를 취득한 때」의 의미
① 「악의로 어음․수표를 취득한 때」의 의미
“어음법 제10조가 규정하는 ‘악의로 어음을 취득한 때'라 함은 소지인이 백지어음이 부당 보충되었다는 사실과 이를 취득할 경우 어음채무자를 해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음을 양수한 때를 말한다(대판 1999.2.9. 98다37736).”라고 판시하여 마치 부당보충의 항변을 어음법 제17조가 적용되는 인적항변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판례에 대해서는 여기서의 악의란 단순히 「소지인이 어음․수표의 부당보충 사실을 알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라는 비판이 있다.
② 중과실의 판단 기준
A. 이미 부당보충된 어음․수표를 취득하는 경우 이는 외관상 완전한 어음․수표와 차이가 없으므로 소지인으로서는 통상의 거래에 요구되는 주의만 기울이면 된다. 판례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어도 백지어음의 부당보충사실을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연히 부당 보충된 어음을 취득한 경우 중과실을 인정한다(대판 1995.6.30. 95다10600).
B. 백지인 채로 어음․수표를 양수하면서 보충권의 범위를 잘못 고지 받은 경우 백지어음․수표의 거래는 완전한 어음․수표의 거래에 비해 이례적인 거래이므로 취득자는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판례는 “어음금액이 백지인 어음을 취득하면서 보충권의 내용에 관하여 어음의 기명날인자에게 직접 조회하지 않았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취득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다(대판 1978.3.14. 77다2020).”라고 하였다. 예컨대, 위 사례에서 A가 乙로부터 어음금액이 백지인 약속어음을 양수하면서 보충권의 범위가 150만 원이라는 乙의 말만 믿고 甲에게 보충권의 내용에 관하여 조회하지 않았다면 A의 중과실이 인정된다. 따라서 甲은 A의 청구에 대하여 부당보충을 이유로 대항할 수 있으므로 A에게 100만 원의 범위에서만 책임을 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