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법대 입학 후 법학이 지루하고 어렵다고 타과 부전공을 운운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법이란 것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맹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이 ‘뭔가 커다란 놈이 있구나!’하고 느꼈다고나 할까요. 21세기라 불리는 현시점에서도 법이란 놈을 만지면, 저 어딘가에 흐르는 수 천 년 전 바빌론, 그리스, 로마시대 할아버지들의 심장 고동소리가 느껴지고, 세련된 향수 냄새 이면에 풍기는 야만인들의 거친 향취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변호사란 직업을 갖게 되면서 겪는 고초도 있고, 주위의 편견도 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제 자식이 법조인 하겠다고 하면 말릴 것 같긴 합니다.
왜 변호사를 하고 있나 하고 생각해보면, 법조인 대다수가 떠올리는 영화 한 편이 있습니다. 1993년작 <필라델피아>란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톰 행크스 분)은 유능한 변호사로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동성애자임이 알려지자 로펌에서 해고당하였습니다. 이에 주인공은 로펌을 상대로 부당해고무효소송을 제기하였고, 에이즈로 점차 병약해지고 있는 가운데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인상적인 발언을 합니다.
“저는 법을 좋아합니다. 제가 법을 다루면서.. 가끔. 아주 가끔은... 정의를 이루는데 기여하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그 느낌은...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아직도 법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라 하지만, 법조인은 약자의 억울함을 같이 할 때도 많습니다.
물론 강자로부터 의뢰를 받았을 경우에도 약자에게 베풂의 미덕을 발휘하게끔 유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첨예한 갈등관계에서 벌어지는 재판이란 것이,
어떨 때는 한바탕 피 튀기게 싸운 다음 서로 감싸 안고 퇴장하는 권투 경기장이거나,
얽힌 한을 풀어주는 굿판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반면 최근에도 법조계 주요 뉴스로 막말 판사, 전관예우 문제가 한동안 회자되었는데,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결코 새로운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놈들이 별 수 있나. 아직도 하는 짓이 똑같구먼.’하는 것이었지요.
오히려 예전 2013년 3월 대법관 출신 법조인의 편의점 개업 소식이 신선했습니다. ‘매년 수억, 수십억 원씩 보장될만한 로펌을 버리고, 편의점 아저씨와 아내의 운전기사를 자청했다니’하는 반응이 자연스러웠지요. (다만, 2013년 8월 화제의 주인공은 ‘無恒産 無恒心[1]'이라는 말과 함께 대형 로펌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하네요.)
사람 사는 게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사는가 봅니다.
판결문도 딱딱할 것이라고만 생각하시면 오해이십니다. 판결도 인간이 쓰는지라 사실관계 판단과 법률용어만으로 빼곡하게 쓰여진 판결도 있는가 하면, 동네 훈장님 목소리를 낼 때도 있습니다.
최근에 접했던 판결인데, 사건 내용은 아들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부모에게 욕을 하며 상해를 가하여 존속상해죄로 기소된 사안이었습니다. 1심에서 아들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하자, 아들이 너무 센 처벌이라며 항소했습니다. 항소심 판사님은 판결문에 이렇게 씁니다(서울서부지방법원 2012. 11. 19. 선고 2012노1012 판결).
무릇 부모님은 자식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인이시다.
그럼에도 부모를 폭행했으니 이는 자식으로서 차마 있을 수 없는 행동이므로 엄히 처벌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집안의 우환으로 범행에 이르게 된 점, 부모가 자식을 위해 탄원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여 감형하기로 한다. 다만 향후 피고인에 대하여 재범의 위험을 방지하고 피고인의 가정의 평안을 위하여 주자의 10가지 교훈 중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不孝父母 死後悔(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돌아가신 뒤에 후회한다)
不親宗族 疎後悔(가족에게 친하게 대하지 않으면 멀어진 뒤에 후회한다)
醉中妄言 醒後悔(술에 취해 망령된 말을 하면 깬 뒤에 후회한다)
또 다른 판결문은 이렇습니다. 장차 신축될 빌딩을 임대해주겠다고 속여 약사 등으로부터 8억 원이 넘는 돈을 편취하고 약 6년이 넘도록 피해회복을 하지 않고 있는 모 엔터테인먼트 회사 대표에 대한 사기죄를 인정한 내용입니다(울산지방법원 2011. 11. 3. 선고 2009고단1840 판결).
(사실관계를 살펴볼 때) 결국 피고인이 주장하는 동업 약정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피고인의 교언영색(巧言令色)[2]에 속아서 피해자들이 거액을 편취당하였다고 인정함이 우리의 경험칙에 부합한다고 할 것이다.
결론 - 事必歸正(사필귀정)[3].
피고인은 존재하지도 않는 메디컬빌딩 신축사업의 동업 약정을 미끼로 자신이 직접 피해자 A로부터 피해자 C 발행의 가계수표를 할인하면서 돈을 차용하고도 뻔뻔하게 A를 만난 사실조차 없다고 발뺌하면서 가정적으로 편취 범위를 부인하는 등 그 犯罪的 惡性(범죄적 악성)이 실로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상의 사정에다가 피고인의 연령, 성행, 지능, 환경, 전과관계, 총 피해금액(8억 7,005만 원), 범행동기와 수법, 범행 후의 정황 등 제반 양형 조건을 두루 참작하여 주문과 같이 형을 정하고, 법정구속한다(뿌린대로 거두리라). 이상의 이유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이와 같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무릎을 칠 때가 간혹 있었는데 미처 다 정리하지 못하여, 다른 변호사님이 인용하셨던 판결을 재인용하여 추가로 소개드립니다(<즐거운 판결>, 정인진 변호사, 2012. 10. 18.자 법률신문 칼럼).
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상태 하에서 피고인에게 유죄를 인정할 것이 아니라 형법 21조 소정의 정당방위나 동법 20조의 정당행위에 관한 법을 적용하여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여야 하고 그러기 위하여 위와 같은 조문이 있음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대법원 78도1490).
② 한 마리 제비로서는 능히 당장에 봄을 이룩할 수 없지만, 그가 전한 봄, 젊은 봄은 오고야 마는 법, 소수의견을 감히 지키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대법원 77다1737 소수의견 중).
③ 증인은 노름판에서 화투를 치다가 피고인(다른 사람)이 노름판을 떠났던 문제의 시각에 때마침 시계를 보았다고 진술하나, 노름을 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마련이므로 믿기 어렵다(대법원 90도1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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