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배상(기)]
판시사항
[1] 국제재판관할을 결정할 때 고려하여야 할 사항
[2] 외국판결을 승인한 결과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지 판단하는 방법
[3] 일제강점기에 국민징용령에 의하여 강제징용되어 일본국 회사인 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구 일본제철’이라 한다)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한 대한민국 국민 甲 등이 구 일본제철이 해산된 후 새로이 설립된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신일본제철’이라 한다)를 상대로 국제법 위반 및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금의 지급을 구한 사안에서, 甲 등이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일본국에서 제기한 소송의 패소확정판결을 승인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므로 효력을 인정할 수 없음에도, 이와 달리 본 원심판결에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고 한 사례
[4] 일제강점기에 국민징용령에 의하여 강제징용되어 일본국 회사인 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구 일본제철’이라 한다)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한 대한민국 국민 甲 등이 구 일본제철이 해산된 후 새로이 설립된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신일본제철’이라 한다)를 상대로 국제법 위반 및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금의 지급을 구한 사안에서, 구 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은 실질적으로 동일성을 유지하여 법적으로 동일한 회사로 볼 수 있으므로, 甲 등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청구권을 신일본제철에 대하여 행사할 수 있다고 한 사례
[5]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였는지 여부(소극)
[6] 일제강점기에 국민징용령에 의하여 강제징용되어 일본국 회사인 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구 일본제철’이라 한다)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한 대한민국 국민 甲 등이 구 일본제철이 해산된 후 새로이 설립된 신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신일본제철’이라 한다)를 상대로 국제법 위반 및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금의 지급을 구한 사안에서, 신일본제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는데도, 이와 달리 본 원심판결에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고 한 사례
참조조문
[1] 국제사법 제2조
[2]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3호
[3]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3호
[4] 구 헌법(1962. 12. 26. 헌법 제6호로 전부 개정되기 전의 것) 부칙(1948. 7. 17.) 제100조, 법례(法例)(1898. 6. 21. 법률 제10호) 제30조, 구 섭외사법(2001. 4. 7. 법률 제6465호 국제사법으로 전부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현행 국제사법 제10조 참조)
[5]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제1조, 제2조
참조판례
[1] 대법원 2005. 1. 27. 선고 2002다59788 판결(공2005상, 294)
주 문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이 유
상고이유를 판단한다.
원심판결의 이유와 원심이 적법하게 채택한 증거들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 원고들은 1923년부터 1929년 사이에 한반도에서 태어나 평양, 보령, 군산 등에서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이고, 일본제철 주식회사(이하 ‘구 일본제철’이라고 한다)는 1934. 1.경 일본에서 설립되어 일본 가마이시(釜石), 야하타(八幡), 오사카(大阪) 등에서 제철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회사이다.
나.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군수물자 생산에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1938. 4. 1. 국가총동원법을 제정·공포하고, 1942년 조선인 내지이입 알선 요강을 제정·실시하고, 한반도 각 지역에서 관알선을 통하여 인력을 모집하였으며, 1944. 10.경부터는 국민징용령에 의하여 일반 한국인에 대한 징용을 실시하였다. 한편 구 일본제철을 비롯한 일본의 철강생산자들을 총괄 지도하는 일본 정부 직속기구인 철강통제회가 1941. 4. 26. 설립되었는데, 철강통제회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노무자를 적극 확충하기로 하고 일본 정부와 협력하여 노무자를 동원하였고, 구 일본제철은 사장이 철강통제회의 회장을 역임하는 등 철강통제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다. 구 일본제철은 1943년 평양에서 오사카제철소의 공원모집 광고를 냈는데, 그 광고에는 오사카제철소에서 2년간 훈련을 받으면 기술을 습득할 수 있고 훈련 종료 후 한반도의 제철소에서 기술자로 취직할 수 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원고 1, 2는 1943. 9.경 위 광고를 보고, 기술을 습득하여 한반도로 돌아와 취직할 수 있다는 점에 끌려 응모한 다음, 평양에서 구 일본제철의 모집담당자와 면접을 하고 합격하여 위 담당자의 인솔 하에 구 일본제철의 오사카제철소로 가서, 훈련공으로서 노역에 종사하였다. 오사카제철소에서 원고 1, 2는 1일 8시간의 3교대제로 일하였고, 한 달에 1, 2회 정도 외출이 허용되었으며, 한 달에 2, 3엔 정도의 용돈만 지급받았을 뿐이고, 구 일본제철은 임금 전액을 지급하면 낭비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원고 1, 2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위 원고들 명의의 구좌에 임금의 대부분을 일방적으로 입금하였으며, 그 저금통장과 도장을 기숙사의 사감에게 보관하게 하였다. 위 원고들은 화로에 석탄을 넣고 깨뜨려서 뒤섞거나 철 파이프 속으로 들어가서 석탄찌꺼기를 제거하는 등 화상의 위험이 있고 기술습득과는 별 관계가 없는 매우 고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제공되는 식사는 그 양이 매우 적었다. 또한 경찰이 자주 들러서 위 원고들에게 ‘도망치더라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하였고 기숙사에서도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위 원고들은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였는데, 원고 2는 도망가고 싶다고 말하였다가 발각되어 기숙사 사감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체벌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은 1944. 2.경 훈련공들을 강제로 징용하였고, 원고 1, 2는 징용 이후에는 용돈도 전혀 지급받지 못하였다. 오사카제철소의 공장은 1945. 3.경 미합중국 군대의 공습으로 파괴되었고 이때 훈련공들 중 일부는 사망하였으며, 원고 1, 2를 포함한 나머지 훈련공들은 1945. 6.경 함경도 청진에 건설 중인 제철소로 배치되어 청진으로 이동하였다. 원고 1, 2는 기숙사의 사감에게 임금이 입금되어 있던 저금통장과 도장을 달라고 요구하였지만, 사감은 청진에 도착한 이후에도 위 통장과 도장을 돌려주지 아니하였고, 원고 1, 2는 청진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공장건설을 위해 토목공사를 하면서도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원고 1, 2는 1945. 8.경 청진공장이 소련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자, 소련군을 피하여 서울로 도망하여 일제로부터 해방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라. 원고 3은 1941년 대전시장의 추천을 받아 보국대로 동원되어 보령에서 구 일본제철 모집담당관의 인솔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구 일본제철의 가마이시제철소에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임금을 저금해준다는 말을 들었을 뿐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원고 4는 1943. 1.경 군산부(지금의 군산시)의 지시를 받고 모집되어 구 일본제철의 인솔자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구 일본제철의 야하타제철소에서 노역에 종사하였는데, 임금을 전혀 받지 못하였고, 도주하다가 발각되어 약 5일 동안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원고 3, 4는 1945. 8.경부터 같은 해 12.경까지 사이에 각 제철소가 공습으로 파괴되고 일본이 패전하여 구 일본제철에서 더 이상 강제노동을 시킬 수 없게 되자 각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 구 일본제철은 일본의 회사경리응급조치법(1946. 8. 15. 법률 제7호), 기업재건정비법(1946. 10. 19. 법률 제40호)의 제정·시행에 따라 위 각 법에서 정한 특별경리회사, 특별경리주식회사로 지정되어 1950. 4. 1.에 해산하였고, 구 일본제철의 자산 출자로 야하타제철(八幡製鐵) 주식회사, 후지제철(富士製鐵) 주식회사, 일철기선(日鐵汽船) 주식회사, 하리마내화연와(播磨耐火煉瓦) 주식회사(위 4개 회사를 이하 ‘제2회사’라 한다)가 설립되었다. 야하타제철 주식회사는 1970. 3. 31. 일본제철 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였고, 1970. 5. 29. 후지제철 주식회사를 합병하여 현재의 피고가 되었다. 회사경리응급조치법은 “특별경리회사에 해당될 경우 그 회사는 지정시(1946. 8. 11. 00:00을 말한다. 제1조 제1호)에 신계정과 구계정을 설정하고(제7조 제1항), 재산목록상의 동산, 부동산, 채권 기타 재산에 대하여는 「회사의 목적인 현재 행하고 있는 사업의 계속 및 전후산업의 회복진흥에 필요한 것」에 한하여 지정시에 신계정에 속하며, 그 외에는 원칙적으로 지정시에 구계정에 속하고(제7조 제2항), 지정시 이후의 원인에 근거하여 발생한 수입 및 지출을 신계정의 수입 및 지출로, 지정시 이전의 원인에 근거하여 발생한 수입 및 지출은 구계정의 수입 및 지출로 경리처리하며(제11조 제1, 2항), 구채권에 대해서는 변제 등 소멸행위를 금지하되, 예외적으로 변제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구계정으로 변제하여야 하고, 신계정으로 변제하는 경우는 특별관리인의 승인 등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일정한 금액의 한도에서만 가능(제14조)”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구 일본제철은 회사경리응급조치법, 기업재건정비법에 따라 1946. 8. 11. 오전 0시를 기준으로 하여 신계정과 구계정으로 구분 경리하여 이후의 기업활동은 오직 신계정에서 행하고 사업의 계속 및 전후산업의 회복진흥에 필요한 기존 재산을 신계정에 속하도록 한 뒤, 신계정에 속하는 재산을 제2회사에 현물출자하거나 자산과 영업을 양도하여 1950. 4. 1. 제2회사를 설립하였고, 그 외 그때까지 발생한 채무를 위주로 한 구계정상의 채무는 구 일본제철의 해산 및 청산절차에 맡겨졌다. 그 결과, 구 일본제철이 보유하고 있던 야하타, 와니시, 가마이시, 후지, 히로하타의 각 제철소 자산 중 야하타 제철소의 자산과 영업, 이사 및 종업원은 제2회사인 야하타제철 주식회사가, 나머지 4개의 제철소의 자산과 영업, 이사 및 종업원은 다른 제2회사인 후지제철 주식회사가 각각 승계하였다.
바.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1951년 말경부터 국교정상화 및 전후 보상문제를 논의하였고 마침내 1965. 6. 22. ‘국교정상화를 위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과 그 부속협정의 하나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청구권협정’이라고 한다)이 체결되었는데, 청구권협정은 제1조에서 일본국이 대한민국에 10년간에 걸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한다고 정함과 아울러 제2조에서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사. 원고 1, 2는 1997. 12. 24.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피고와 일본국을 상대로 국제법 위반 및 불법행위 등을 이유로 한 손해배상금과 강제노동기간 동안 지급받지 못한 임금 등의 지급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가 2001. 3. 27. 원고청구기각 판결을 선고받고, 오사카고등재판소에 항소하였으나 2002. 11. 19. 항소기각판결을 선고받았으며, 2003. 10. 9. 최고재판소의 상고기각 및 상고불수리 결정으로 위 판결들이 확정되었다(이와 같은 일본에서의 소송을 이하 ‘일본소송’이라 하고, 그 판결들을 ‘일본판결’이라고 한다). 한편 원고들은 원고 1, 2의 일본소송이 종료한 이후인 2005. 2. 28. 대한민국 법원인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피고를 상대로 국제법 위반 및 불법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금의 지급을 구하면서 이 사건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원고 1, 2는 일본소송에서 주장한 청구원인과 동일한 내용을 이 사건 소송의 청구원인으로 하였다.
아. 대한민국 정부는 원고들이 이 사건 소송을 제기하기 직전 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일부 문서를 공개한 후, 이 사건 소송이 제기된 후인 2005. 8. 26.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관련 민관공동위원회’(이하 ‘민관공동위원회’라고 한다)를 개최하고,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정부와 군대 등 일본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으며, 사할린동포 문제와 원폭피해자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취지의 공식의견을 표명하였다.
가. 구 일본제철과 피고의 법적 동일성 여부 원심은, 구 일본제철이 일본국과 함께 조직적인 기망에 의하여 원고 3, 4를 동원하여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하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하면서도 구 일본제철과 피고의 법인격이 동일하다거나 구 일본제철의 위 원고들에 대한 채무를 피고가 승계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위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그러나 원심의 이러한 판단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대로 수긍할 수 없다. 구 일본제철의 해산 및 분할에 따른 법인격의 소멸 여부, 제2회사 및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승계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법은 법정지인 대한민국에 있어서 외국적 요소가 있는 법률관계에 적용될 준거법의 결정에 관한 규범(이하 ‘저촉규범’이라 한다)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는데, 그 법률관계가 발생한 시점은 구 섭외사법(1962. 1. 15. 법률 제996호로 제정된 것)이 시행된 1962. 1. 15.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걸쳐 있다. 그 중 1962. 1. 15. 이전에 발생한 법률관계에 적용되는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은 1912. 3. 28.부터 일왕(日王)의 칙령 제21호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의용(依用)되어 오다가 군정 법령 제21호를 거쳐 대한민국 제헌헌법 부칙 제100조에 의하여 “현행법령”으로서 대한민국 법질서에 편입된 일본의 ‘법례(法例)’(1898. 6. 21. 법률 제10호)이다. 위 ‘법례’는 구 일본제철과 제2회사 및 피고의 법적 동일성 여부를 판단할 법인의 속인법에 대하여 명문의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았지만, 법인의 설립준거지법이나 본거지법에 의하여 이를 판단한다고 해석되고 있었고, 구 일본제철과 제2회사 및 피고의 설립준거지와 본거지는 모두 일본이므로, 구 일본제철의 해산 및 분할에 따른 법인격의 소멸 여부, 채무 승계 여부를 판단할 준거법은 일단 일본법이 될 것인데, 여기에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편 위 ‘법례’ 제30조는 “외국법에 의한 경우에 그 규정이 공공의 질서 또는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때에는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에 따라 준거법으로 지정된 일본법을 적용한 결과가 대한민국의 공서양속에 위반되면 일본법의 적용을 배제하고, 법정지인 대한민국의 법률을 적용하여야 한다. 또한 1962. 1. 15. 이후에 발생한 법률관계에 적용되는 구 섭외사법에 있어서도 이러한 법리는 마찬가지이다. 이 사건에서 외국법인 일본법을 적용하게 되면, 위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채권을 피고에 대하여 주장하지 못하게 되는데, 위 1. 마.항에서 본 바와 같이 구 일본제철이 피고로 변경되는 과정에서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영업재산, 임원, 종업원을 실질적으로 승계하여 회사의 인적, 물적 구성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없었음에도, 전후처리 및 배상채무 해결을 위한 일본 국내의 특별한 목적 아래 제정된 기술적 입법에 불과한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 등 일본 국내법을 이유로 구 일본제철의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채무가 면탈되는 결과로 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공서양속에 비추어 용인할 수 없다. 일본법의 적용을 배제하고 당시의 대한민국 법률을 적용하여 보면, 구 일본제철이 위 1. 마.항에서 본 바와 같이 책임재산이 되는 자산과 영업, 인력을 제2회사에 이전하여 동일한 사업을 계속한 점 등에 비추어 구 일본제철과 피고는 그 실질에 있어서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봄이 상당하여 법적으로는 동일한 회사로 평가하기에 충분하고, 일본국의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구 일본제철이 해산되고 제2회사가 설립된 뒤 흡수합병의 과정을 거쳐 피고로 변경되는 등의 절차를 거쳤다고 하여 달리 볼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청구권을 피고에 대하여도 행사할 수 있다. 결국 원심의 이 부분 판단은 저촉규범에서의 공서규정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을 저지른 것이다. 이 점을 지적하는 위 원고들의 이 부분 상고이유 주장은 이유가 있다.
나. 청구권협정에 의한 위 원고들의 청구권의 소멸 여부
(1) 원심은 앞서의 판단에 부가하여 위 원고들이 국내법상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시효의 완성으로 모두 소멸하였다는 취지로 판시하였고, 이에 대하여 위 원고들은 원심이 소멸시효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였다는 취지의 상고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상고이유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그 선결문제로서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위 원고들의 청구권이 소멸하였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2)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서, 청구권협정 제1조에 의해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은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 대가관계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 점,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위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하여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아니하였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아니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 나아가 국가가 조약을 체결하여 외교적 보호권을 포기함에 그치지 않고 국가와는 별개의 법인격을 가진 국민 개인의 동의 없이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직접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근대법의 원리와 상충되는 점, 국가가 조약을 통하여 국민의 개인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이 국제법상 허용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와 국민 개인이 별개의 법적 주체임을 고려하면 조약에 명확한 근거가 없는 한 조약 체결로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 이외에 국민의 개인청구권까지 소멸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인데, 청구권협정에는 개인청구권의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한 근거가 없는 점, 일본이 청구권협정 직후 일본국 내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내용의 재산권조치법을 제정·시행한 조치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위 원고들의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됨으로써 일본의 국내 조치로 해당 청구권이 일본국 내에서 소멸하여도 대한민국이 이를 외교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상실하게 될 뿐이다.
(3) 따라서 위 원고들의 피고에 대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위 원고들은 피고에 대하여 이러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다.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할 수 있는지 여부
(1) 준거법
위 원고들의 청구권이 발생한 시점에 적용되는 대한민국의 저촉규범에 해당하는 위 ‘법례’에 의하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성립과 효력은 불법행위 발생지의 법률에 의하는데(제11조), 이 사건 불법행위지는 대한민국과 일본에 걸쳐 있으므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에 관하여 판단할 준거법은 대한민국법 또는 일본법이 될 것이나, 이미 공동원고들인 원고 1, 2가 일본법이 적용된 일본소송에서 패소한 점에 비추어 원고 3, 4는 자신들에게 보다 유리한 준거법으로 대한민국법을 선택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추인되므로, 대한민국 법원은 대한민국법을 준거법으로 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나아가 제정 민법이 시행된 1960. 1. 1. 이전에 발생한 사건이 불법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와 그 손해배상청구권이 시효로 소멸하였는지 여부의 판단에 적용될 대한민국법은 제정 민법 부칙 제2조 본문에 따라 ‘구 민법(의용 민법)’이 아닌 ‘현행 민법’이다.
(2)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항변의 가부 소멸시효는 객관적으로 권리가 발생하여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진행하고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동안은 진행하지 않지만 여기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경우라 함은 그 권리행사에 법률상의 장애사유, 예컨대 기간의 미도래나 조건 불성취 등이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사실상 권리의 존재나 권리행사 가능성을 알지 못하였고 알지 못함에 과실이 없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유는 법률상 장애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대법원 2006. 4. 27. 선고 2006다1381 판결 등 참조). 한편 채무자의 소멸시효에 기한 항변권의 행사도 민법의 대원칙인 신의성실의 원칙과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서, 채무자가 시효완성 전에 채권자의 권리행사나 시효중단을 불가능 또는 현저히 곤란하게 하였거나 그러한 조치가 불필요하다고 믿게 하는 행동을 하였거나, 객관적으로 채권자가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거나, 또는 일단 시효완성 후에 채무자가 시효를 원용하지 아니할 것 같은 태도를 보여 권리자로 하여금 그와 같이 신뢰하게 하였거나, 채권자보호의 필요성이 크고 같은 조건의 다른 채권자가 채무의 변제를 수령하는 등의 사정이 있어 채무이행의 거절을 인정함이 현저히 부당하거나 불공평하게 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대법원 2011. 6. 30. 선고 2009다72599 판결 등 참조). 원심판결의 이유와 원심이 적법하게 채택한 증거들에 의하면, 위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의 불법행위가 있은 후 1965. 6. 22. 한일 간의 국교가 수립될 때까지는 일본국과 대한민국 사이의 국교가 단절되어 있었고, 따라서 위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판결을 받더라도 이를 집행할 수 없었던 사실, 1965년 한일 간에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나, 한일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모두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청구권협정 제2조 및 그 합의의사록의 규정과 관련하여 청구권협정으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개인청구권이 포괄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견해가 대한민국 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사실, 일본에서는 청구권협정의 후속조치로 재산권조치법을 제정하여 원고들의 청구권을 일본 국내적으로 소멸시키는 조치를 취하였고 공동원고들인 원고 1, 2가 제기한 일본소송에서 청구권협정과 재산권조치법이 이들의 청구를 기각하는 부가적인 근거로 명시되기도 한 사실, 그런데 원고들의 개인청구권,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원고 1, 2 등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한 1990년대 후반 이후에야 서서히 부각되었고 마침내 2005. 1. 한국에서 한일 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된 뒤, 2005. 8. 26.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민관공동위원회의 공식적 견해가 표명된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앞서 본 바와 같이 구 일본제철과 피고의 동일성 여부에 대하여도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일본에서의 법적 조치가 있었던 점을 더하여 보면, 적어도 위 원고들이 이 사건 소를 제기할 시점인 2005. 2.까지는 위 원고들이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 이러한 점들을 앞서 본 법리에 비추어 살펴보면, 구 일본제철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법적 지위에 있는 피고가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여 위 원고들에 대한 채무의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 그럼에도 원심이 그 판시와 같은 사정만으로는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 신의칙 위반에 의한 권리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소멸시효 주장의 신의칙에 의한 제한의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을 저지른 것이다. 이 점을 지적하는 위 원고들의 이 부분 상고이유 주장 또한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원고들은 각 국제법 위반과 국내법 위반을 이 사건 손해배상청구의 원인으로 주장하였는데, 원심은 이를 별개의 소송물로 본 듯한 판시를 하였으나, 이는 별개의 소송물이라기보다는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에 있어서의 공격방법을 달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원심판결 전부를 파기한다), 사건을 다시 심리·판단하도록 원심법원에 환송하기로 하여 관여 대법관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